설명회 빙자 접대ㆍ번역비 위장 등 뒷거래 수법 은밀하게 진화
처벌 가벼워 리베이트 근절 안 돼
# 미국계 의료기기 업체인 A사는 툭하면 국내 종합병원 의사들을 하와이, 싱가포르, 태국으로 초청했다. 해외에서 제품설명회나 학회를 연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 일정은 골프와 관광 접대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2년 2개월 동안 A사로부터 이런 식의 접대를 받은 의사는 74명에 달했다.
# 국내 제약업체 B사는 2010년 9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시장조사 설문응답이나 논문 번역 수고비조로 거래처 의사 461명에게 1인당 최대 360여만원을 지급했다. 의사들은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B사는 마치 의사가 번역한 것처럼 논문을 조작하거나 설문지를 가짜로 꾸몄다.
제약업계와 의료계의 악습인 ‘리베이트’ 관행이 여전히 만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리베이트 근절을 위해 제약업체와 향응을 받은 의사를 모두 처벌하는 ‘쌍벌제’까지 도입했으나 느슨한 처벌 기준 탓에 한층 은밀한 수법으로 뒷거래가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서부지검 ‘정부합동 의약품 리베이트 수사단(단장 이철희 부장)’은 의약기기나 의약품을 판매하고 의사들에게 리베이트(사례금)를 제공한 업체 9곳과 이들로부터 향응을 받아 챙긴 의사 536명을 적발했다고 30일 밝혔다. 이 가운데 A사 부사장 박모(42)씨와 B사 영업이사 손모(46)씨 등 업체 관계자 7명과 김모(48)씨 등 의사 4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수사결과 외국계 제약사로는 이례적으로 적발된 A사의 박씨 해외관광과 골프비용 등 총 2억3,900만원을 뒷돈으로 제공했고, 손씨는 의사들에게 554회에 걸쳐 3억5,900만원을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대학병원 교수인 김씨는 2012년 3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전문의약품 처방을 대가로 7개 대형 제약회사로부터 2,028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10년 향응을 받은 사람도 처벌하는 리베이트 쌍벌제를 시행하고, 지난해에는 리베이트를 제공한 제약업체를 보험급여 대상에서 제외하는 ‘리베이트 투아웃제’를 도입하는 등 처벌을 크게 강화했다. 형사처벌을 받은 의사에게는 2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업체 관계자에게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내려진다.
하지만 이번 수사에서 적발된 530여명의 의사 중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김씨 등 4명뿐이다. 공소시효가 지난 건을 제외하고도, 형사처벌 대신 행정처분 의뢰에 그친 대상이 339명에 이른다. 행정처분은 의사가 받은 리베이트가 300만원 이상일 때는 2~12개월 면허정지, 300만원 미만은 경고에 그친다. 한 제약업체 관계자는 “쌍벌제를 도입해도 사법처리 기준이 되는 향응 액수가 300만원 이상이어서 의사들이 쪼개기 후원을 받는 경우가 많고, 업체들도 리베이트로 인한 이익이 훨씬 커 대부분 벌금을 내고 형사처벌을 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외국계 제약업체도 앞다퉈 리베이트 제공에 나설 만큼 쌍벌제 도입의 취지가 무색해졌다”며 “불법 뒷돈 관행이 뿌리 뽑힐 때까지 단속활동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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