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 신청 열풍… 작년 15만여건 2000년대 초반보다 3배 늘어
상대방에게 약점 안보이려하고 자아에 대한 불만의 투사 심리
운명 바꾸려는 욕심에서 선택… 자신의 내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최근 들어 개명(改名) 열풍이 거세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법원에 접수된 개명 신청 건수는 지난해 15만7,000건, 올 상반기 8,000여명에 이른다. 개명 신청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간 5만 건도 안 됐다. 하지만 2005년 11월 대법원이 범죄 은폐 등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면 개명을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한 이후 신청이 폭증했다. 사람들은 왜 개명을 하는 걸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개명(改名) 욕구는 심리적으로 성형욕구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개명을 통해 해결하려는 일종의 심리반응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인간에게 얼굴과 몸매가 비언어적인 정체성의 상징이라면 이름은 언어적으로 가장 강력한 상징”이라며 “성형처럼 개명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윤 교수는 “개명욕구는 자신의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내지 않고 반사적으로 은폐, 축소하려는 방어기제가 작용된 것”이라면서도 “이름을 바꾼다고 인생이 갑자기 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했다. 이나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는 “개명욕구는 자아에 대한 불만을 외모에 투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면서 “이름이 문제가 아닌데 개명을 하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 김치국 송아지 등 놀림 대상 땐 개명 필요
개명에 대한 욕구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2013년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14권 9호)에 실린 ‘개명의 동기와 개명 후 자기지각척도에 관한 연구’ 논문(저자 신상춘, 조성제)에 따르면 고려시대 왕 33명 중 16명이 이름을 바꿨다. 무신정권 시대의 대표 인물인 최충헌도 개명한 이름이고, 고려 말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는 두 번이나 이름을 바꿨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대역죄를 지은 사람과 이름이 같아 개명을 신청한 이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최근 강호순 등 흉악범과 이름이 동일해 개명을 신청한 사람들과 같은 이유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서동개’ ‘김치국’ ‘강도년’ ‘경운기’ ‘강호구’ ‘송아지’ 등처럼 의미나 발음이 나쁘거나 놀림감이 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개명의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특별히 이름이 나쁘지 않은데 개명을 하려한다면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불만과 문제를 개명을 통해 해결하려는 심리가 내면에 깔려있다고 진단한다.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마음드림의원 원장)는 “과거에는 이름을 짓는 과정이 매우 신중하고 진지한 작업이었는데 최근에는 단순히 발음하기 좋고 세련돼 보이기 위해 개명을 하고자 하는 것 같다”면서 “유행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관찰하고 고민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 정체성 확립 아닌 ‘인생역전’ 위해 개명은 사회현실 반영
개명의 이유에는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 아닌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혼재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개명의 동기와 개명 후 자기지각척도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명 희망의 이유로 ▦좋은 이름을 갖고 싶어서 ▦운명을 바꾸고 싶어서 ▦이름이 나쁘다고 해서 ▦성공하고 싶어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예쁜 이름을 갖고 싶어서 ▦부자가 되고 싶어서 등을 손꼽았다.
박한선 성안드레아신경정신병원 과장은 “개명 신청자의 73%가 작명소를 이용한 것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명동기는 자아 정체성 확립보다 운명을 바꾸고, 성공을 이루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비록 상당수의 개명신청자들이 개명 후 주관적인 만족감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개명이 현실적인 성공 가능성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며 우려를 표했다. 박 과장은 “개명을 신청한 이들 중 대다수는 이름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성명학적 의식에 일정부분 동의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 개명동기인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성명학적 고려가 작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름도 인기 순… 이름 고유 역할, 차별화 상실 우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주민등록상 개명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역할이나 지위에 따라 부여된 이름으로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자아를 확립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예명이나 자, 호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정찬승 원장은 “가톨릭의 세례명, 불교의 법명 등이 대표적”이라면서 “개명 신청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이 개명을 통해 삶을 새롭게 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일지 모른다”고 했다. 윤대현 교수는 “현대인들은 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신경을 쓰지만 내가 갖고 있는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면서 “개명을 원하는 것도 결국 내가 갖고 있는 약점을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속내”라고 했다. 윤 교수는 “개명을 해도 자기 내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현실에서 어떠한 만족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 “어찌 보면 현대인들은 이제 예쁨보다 ‘미움 받을 용기’를 내야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개명 열풍이 불면서 너도 나도 좋은 이름을 선택하다 보니 특정이름이 흔한 이름으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기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올 6월 기준으로 개명 할 때 가장 인기 있는 이름은 남자의 경우 민준, 여자는 수연이었다. 남자는 현우 정우 서준 도현 등이 뒤를 이었고, 여자는 지원 서연 서영 서윤 등도 인기가 높았다. 이나미 박사는 “사람에게 있어 이름은 다름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이름이 유행을 탄다는 것은 우리사회가 그만큼 가볍고, 내면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 같다 씁쓸하다”라고 말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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