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에서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 방침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지 벌써 열 달이 지났다. 발표 직후부터 연구진을 꾸려 연구하겠노라고 말했지만 98%의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시킨다고 해놓고 몇 시간이나 가르치고 얼마나 많은 양을 다루는지 조사한 것도 없다. 발표 전이나 후에나 연구다운 연구가 한 건도 없다. 그리고 결정의 시기는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한자 병기는 교육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를 넘어서 우리 문자 생활에 큰 혼란을 부를 일인데,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해도 되는가?
초등교과서는 1970년에 한글 전용이 확립되어 46년 넘게 이어졌다. 나도, 군대에 간 내 아이도 한글 교과서로 공부했다. 무려 46년이다. 그러니 교육부에서 교과서 한글 전용을 바꾸려 한다면 먼저 한글 전용 교과서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근거를 대야 한다. 사람들이 말로는 다 알아듣는데, 한글로 적어놓으면 뜻을 모른다든가 하는 그런 문제점 말이다.
그러나 눈을 씻고 봐도 교과서가 한글 전용이라 문제 있다는 교육부의 연구는 찾을 수 없다. 반대로 한글 전용 교과서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증거는 댈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글 교과서로 공부한 우리 중3 학생들이 ‘독해력’ 분야 1위이다. 한글 교과서로 공부한 탓에 문장 뜻을 모르니 한자를 병기해주자는 일부 어른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보여준다.
교육부에서는 ‘교과용 도서 편찬상의 유의점 및 검정기준’에 제한적인 병기 규정이 있으니 정책의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한자 병기 옹호자들이 2011년에 슬쩍 끼워 넣은 규정인데,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하여 교육 목적상 필요한 경우’에 제한적으로 병기를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 걸음 양보해도, 그 취지에 맞게 적용하면 그만이지 왜 굳이 한자 병기를 검토하겠노라고 발표했는가? 이는 긴급 또는 보수차량만 갓길로 갈 수 있다는 제한적 규정을 핑계로 갓길 주행은 언제든 가능하다고 둘러대는 궤변과 다름없다.
‘인문사회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한자교육 활성화’가 필요하고, ‘한자교육 활성화’를 위해 ‘교과서 한자 병기’를 하겠다는 게 교육부 논리다. 인문사회적 소양에 독서만큼 좋은 게 없지만 한자 공부도 어떻든 도움이 된다고 인정해보자. 이는 마치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운동이 가장 좋은 처방이지만 그 대신 ‘영양제 복용’을 대책으로 꼽는 것과 비슷하다. 영양제도 도움이 되기는 될 거다.
한자교육 활성화를 위해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것은 마치 ‘영양제 복용’을 까먹지 않고 주기적으로 강제하기 위해 밥과 반찬에 영양제를 넣어 먹도록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영양제는 필요한 사람만 필요한 때에 먹으면 그만인데, 풍부한 영양의 원천인 음식에 모두가 영양제를 섞어 먹어야 한다면 아이들이 밥을 먹으려고 들까?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이나 균형 잡힌 식사에 우선해 영양제를 먹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바로 교과서 한자 병기 방침이다.
뚜렷한 필요조차 대지 못하는 이 정책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꼼꼼하게 조사하고 연구할 것을 교육부에 제안한다. 한글 세대의 독해력이 세대 간, 국가 간 비교에서 정말 문제 있는지 먼저 조사하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결책이 한자교육 활성화인지 독서 활성화인지 다른 무엇인지 연구하라. 그래서 한자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명 나면 한자교육 활성화를 위해 지금도 실시하고 있는 중고교 한문수업의 문제와 개선책은 무엇인지 짚어야 한다. 그럼에도 한자 병기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면 그것과 교과수업 사이에 충돌은 없을지, 읽기 속도와 흥미가 떨어져 더 많은 것을 잃지 않을지 연구해야 한다. 이왕 질러놓은 거 어쩔 수 없다고 밀어붙이지만 말고 이제라도 순리대로 가기를 교육부에 바란다.
이건범 작가ㆍ한글문화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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