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대한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나라 사이에 합병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후략).’ 1910년 8월22일 체결돼, 8월29일 공포된 한일합병조약의 전문(前文)이다. 대한제국 통치권 일체의 완전하고 영구한 양도(1조), 대한제국 황제(순종)와 태황제(고종), 황태자(영친왕) 일가와 후손의 처우 보장(3조), 합병 공로자에 대한 표창과 작위, 은급 수여(5조) 등 8개조가 뒤따랐다.
▦ 5년 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은 국제법상 절대적 무효사유인 ‘강박(强迫)에 의한’조약이었다. 일제는 이런 논란을 피하려고 합병조약에서는 위임장과 조약문, 순종 황제의 칙유(勅諭) 등의 형식요건을 두루 갖추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일본측 합병조약 합법론의 주된 근거다. 반면 8조의 ‘양국 황제의 결재를 받았다’는 조항이 드러내는 사후 비준 절차의 결함, 잇따라 확인된 순종 황제의 비준 거부 등이 한국측 불법론의 기둥이다.
▦ 한일 합병조약의 유ㆍ무효 논쟁은 그 정점인 1965년 한일협정에서도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란 합의 문구를 한국측은 ‘합병 당시부터 무효’로, 일본측은 ‘합병 당시는 유효했으나 지금은 무효’라고 해석하는 데 그쳤다. 당시 협상 대표나 정부만 비난하기도 어렵다. 냉전체제와 한반도 주변정세 등 ‘특별한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데다 아직까지 마땅한 대안도 나오지 않았다.
▦ 105년 전의 경술국치(庚戌國恥)가 그랬듯, 50년 전의 한일협정 또한 당대의 국운이라는 역사허무주의에 기울기 십상이다. 경술국치 이후 요원의 불길 같았을 무장항일운동 참여가 실제로는 민중의 1.1%에 그쳤다는 통계는 나라를 잃은 부끄러움조차 황실과 일부 지배층의 정서였을 뿐 대다수 백성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일깨운다. 나중의 화려한 포장이 빚었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한(韓)민족’이란 집단의식 자체가 의심스럽다. 29일 국치일을 맞아 ‘내 탓’이 빠진 역사인식의 편함과 허망함이 새삼스럽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마찬가지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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