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미국 문학 대표하는 레이먼드 카버의 미발표 단편집
표제작 주제는 '파탄 난 결혼' 자서전 안 남겨 에세이에도 관심
“마지막의 마지막.”
2000년 1월 시인 테스 갤러거는 작고한 남편 레이먼드 카버의 미발표작 출간을 준비하면서 친구에게 위와 같은 글을 써 보냈다.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꼽히는 카버는 1938년 오리건주 클래츠커니에서 태어나 1988년 워싱턴주 포트앤젤레스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19세에 결혼해 지독한 생활고 속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그는 1967년 발표한 단편 ‘제발 조용히 좀 해요’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 등으로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새로 출간된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는 생전에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았던 카버의 미발표 단편집이다. 카버의 두 번째 부인인 갤러거는 남편이 죽은 뒤 10여년 간 그가 남긴 자료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원고들을 찾아냈고, 여기에 에세이와 명상록, 초기 단편, 쓰다 만 장편소설, 서문, 서평까지 한데 그러모아 책을 출간했다.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인 셈이다.
책에 실린 미발표 단편은 다섯 편이다. 표제작인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는 잡지에도 실린 적 없는 작품으로, 카버가 타자로 친 뒤 육필로 한 번 교정한 원고를 그대로 실었다. 그가 즐겨 다뤘던 파탄 난 결혼을 주제로,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불가항력에 가까운 힘에 이끌려 급속히 멀어지는 부부의 모습을 서늘하게 그렸다.
카버의 작품 세계를 익히 아는 독자들에겐 단편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흥미로울지 모른다. 생전에 자서전을 남기지 않은 카버는 여기서 자신이 20~30대에 어떤 생활을 했고, 누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으며, 왜 장편소설을 쓰지 않는지에 대해 무람없이 털어 놓는다.
“나는 제재소, 잡역부, 배달, 주유소, 상품창고 일 등 온갖 잡일을 했다. 어느 여름에는 먹고 살기 위해 캘리포니아 아카타에서 낮이면 튤립을 꺾었다. 정말이다. (…) 심지어 한 번은, 비록 몇 분 정도에 불과하지만_내 앞에 지원서가 놓여 있었다_빚 수금 대행업자가 되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카버는 젊은 시절을 “좌절하여 천천히 미쳐갔던” 시기라고 회고한다. 당시의 환경은 그가 장편소설 쓰는 것을 금지했다. 시간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볼 때, 장편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그 자체로 이치에 맞는 세상을, 작가가 믿을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하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 (…) 작가가 아는 그 세계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며 그에 대해 쓸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아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살아가던 세상은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았다.”
카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보는 ‘오거스틴의 비망록’은 감회가 새롭다. 10쪽 남짓한 이 글은 생전에 한편의 장편소설도 남기지 않은 작가가 장편을 쓰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으로, 손바닥 위에 세계를 올려놓으려던 작가가 다시 힘없이 내려놓는 모습을 훔쳐보는 듯 하다.
갤러거는 서문에서 남편이 죽은 뒤 카버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을 찾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내인 요코와 함께 찾아온 하루키는 번역을 하는 동안 레이먼드가 옆에 있다고 느꼈으며 그의 전집 번역을 마치는 게 두렵다고 털어놨다. 하루키의 두려움에 공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마지막 한 장 남은 사진이다. 사진 속 카버의 눈빛은 여전히 데일 듯이 뜨겁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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