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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거장이 장편소설을 쓰다 손을 놓은 까닭은…

입력
2015.08.2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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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미국 문학 대표하는 레이먼드 카버의 미발표 단편집

표제작 주제는 '파탄 난 결혼' 자서전 안 남겨 에세이에도 관심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레이먼드 카버 지음·최용준 옮김 문학동네 발행·500쪽·1만5,800원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레이먼드 카버 지음·최용준 옮김 문학동네 발행·500쪽·1만5,800원

“마지막의 마지막.”

2000년 1월 시인 테스 갤러거는 작고한 남편 레이먼드 카버의 미발표작 출간을 준비하면서 친구에게 위와 같은 글을 써 보냈다.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꼽히는 카버는 1938년 오리건주 클래츠커니에서 태어나 1988년 워싱턴주 포트앤젤레스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19세에 결혼해 지독한 생활고 속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그는 1967년 발표한 단편 ‘제발 조용히 좀 해요’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 등으로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새로 출간된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는 생전에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았던 카버의 미발표 단편집이다. 카버의 두 번째 부인인 갤러거는 남편이 죽은 뒤 10여년 간 그가 남긴 자료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원고들을 찾아냈고, 여기에 에세이와 명상록, 초기 단편, 쓰다 만 장편소설, 서문, 서평까지 한데 그러모아 책을 출간했다.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인 셈이다.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로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 1988년 폐암으로 세상을 뜬 뒤 아내가 미발표 단편과 에세이, 서평 등을 묶어 유고집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를 출간했다. 문학동네 제공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로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 1988년 폐암으로 세상을 뜬 뒤 아내가 미발표 단편과 에세이, 서평 등을 묶어 유고집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를 출간했다. 문학동네 제공

책에 실린 미발표 단편은 다섯 편이다. 표제작인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는 잡지에도 실린 적 없는 작품으로, 카버가 타자로 친 뒤 육필로 한 번 교정한 원고를 그대로 실었다. 그가 즐겨 다뤘던 파탄 난 결혼을 주제로,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불가항력에 가까운 힘에 이끌려 급속히 멀어지는 부부의 모습을 서늘하게 그렸다.

카버의 작품 세계를 익히 아는 독자들에겐 단편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흥미로울지 모른다. 생전에 자서전을 남기지 않은 카버는 여기서 자신이 20~30대에 어떤 생활을 했고, 누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으며, 왜 장편소설을 쓰지 않는지에 대해 무람없이 털어 놓는다.

“나는 제재소, 잡역부, 배달, 주유소, 상품창고 일 등 온갖 잡일을 했다. 어느 여름에는 먹고 살기 위해 캘리포니아 아카타에서 낮이면 튤립을 꺾었다. 정말이다. (…) 심지어 한 번은, 비록 몇 분 정도에 불과하지만_내 앞에 지원서가 놓여 있었다_빚 수금 대행업자가 되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카버는 젊은 시절을 “좌절하여 천천히 미쳐갔던” 시기라고 회고한다. 당시의 환경은 그가 장편소설 쓰는 것을 금지했다. 시간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볼 때, 장편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그 자체로 이치에 맞는 세상을, 작가가 믿을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하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 (…) 작가가 아는 그 세계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며 그에 대해 쓸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아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살아가던 세상은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았다.”

카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보는 ‘오거스틴의 비망록’은 감회가 새롭다. 10쪽 남짓한 이 글은 생전에 한편의 장편소설도 남기지 않은 작가가 장편을 쓰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으로, 손바닥 위에 세계를 올려놓으려던 작가가 다시 힘없이 내려놓는 모습을 훔쳐보는 듯 하다.

갤러거는 서문에서 남편이 죽은 뒤 카버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을 찾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내인 요코와 함께 찾아온 하루키는 번역을 하는 동안 레이먼드가 옆에 있다고 느꼈으며 그의 전집 번역을 마치는 게 두렵다고 털어놨다. 하루키의 두려움에 공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마지막 한 장 남은 사진이다. 사진 속 카버의 눈빛은 여전히 데일 듯이 뜨겁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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