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성동혁 시인의 시 ‘리시안셔스’의 한 구절이다. 굳이 따질 것 없이 그 자체로 예쁜 말이고 사랑스러운 말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저 구절을 곱씹을 때마다 대뜸 뒷골이 쓰라리다. 마냥 푸근해지는 듯싶다가 점차 맥이 빠지며 푸근함 아래 묻힌 독성 같은 게 배어나오는 것도 같다. 시인의 탓은 물론 아니다. 고백하건대, 누구에게 꽃을 선물해 본 기억이 내겐 별로 없다. 꽃을 건네고자 하는 마음일 때에도, 감춰야 할 가시부터 만지게 한 건 아닐까 자못 놀랄 때가 많았다. 꽃이 왜 아름다운지 모른다고 떠벌이며, 그 무지와 몽매를 상대에게마저 설득시키려 오만을 부렸던 건지도 모른다. 저 구절 조금 앞엔 이런 구절도 있다. “마지막 애인에겐 미안한 일이 많았다” 헤어지려고 미안해하는 건 위선일 테지만 미안해서 헤어지는 건 어리석되 가식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헤어진 적 있고, 그게 또 미안해서 뒤늦게 꽃을 주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이미 적기는 아니다. 꽃을 잘못 건네면 이미 시든 마음에 그 화려한 빛이 자칫 흉기로 돌변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가끔 화원 앞을 지나면 미처 건네지 못한 마음과 말들이 뱀처럼 뒤엉켜 싸늘하게 죽어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그래도, 여전히 꽃을 건네고 싶을 때가 있다. 이미 미안해버린 나에게도, 미안해서 영영 과거가 돼버린 너에게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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