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도자기의 역할 중 가장 큰 것은 예기의 제작이었다. 이러한 예기는 원래 청동기로 제작되었으며 엄격한 양식이 존재한다. 주로 청동기 제작을 위한 모본이지만 도자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송대 도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기와 제기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송 조정은 왕조 초기부터 예제 확립, 구체적으로는 종묘제의를 확립하기 위해 재현삼대의 회복에 힘썼다. 송태종은 개국군주로서 새로운 시대를 선포했고 새로운 예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송대의 예제 개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송 휘종이었다. 송 휘종은 대관 원년(1107) 상서성에 의례국을 설치하였고 천하의 고동기를 수집했다.
따라서 송대의 관요(송대5대 명요)는 도공의 창의적인 작품이라기 보다는 수집된 고동기를 바탕으로 삼대의 재현을 위한 고동기 방제도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휘종은 수집한 고동기를 참고로 '선화중수박고도' 전서를 편찬했는데 이는 각종 기물을 시대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또 윤곽선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명문과 함께 크키·용량·중량 등이 기록되어 있고 고증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가요는 송대에 소성되었으며, 본래 용천의 유전요에서 처주인(處州人) 장씨(章氏) 형제에 의해 나누어 제조됐다. 형의 이름은 장생일이며 당시에 그가 제조한 자기를 별도로 분류하여 '가요(哥窯)'라고 불렀다. 자태는 정세하고 자색을 띠며 약간 박질에 가깝다. 유색은 청색이며 농담에는 각기 차이가 있다. '자구철족'의 현상이 있으며, 빙렬이 많은데 은은하게 어자(魚子)처럼 기면 전체에 퍼져 있다. 유색은 분청색 두 종류가 있으며, 유액이 순정한 것을 높이 친다.
당병균의 '문방사고'에서는 "고가요자기는 그 바탕에 어자 같은 은은한 빙렬문이 있으며, 고관요 자기의 바탕에 있는 은은한 빙렬문이 해조와 비슷하다. 쇄기의 빙렬문은 대소의 잔금들이 문양처럼 나 있다. 고가요자기 가운데 유색이 뛰어난 것은 관요에 비해 손색이 없고, '백급쇄(百圾碎)'라고도 칭하였으나, 현재는 다만 은은한 빙렬문만으로 분별할 뿐이다"라고 적었다.
첸쩡샤는 '중한고미술협회'이사로 1,000여점의 중국도자기를 두루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C'는 중국도자기(Chinese ceramics)를 뜻한다.
채준 기자 dooria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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