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6월 11일 베트남 사이공의 고승 틱광득(釋廣德,1897~1963년) 스님의 분신 장면(사진)을 찍은 AP뉴스 사진기자 말콤 브라운(Malcolm Browne, 1931~2012ㆍ얼굴사진)이 3년 전 8월 27일 숨졌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남베트남 반공 독재자 응오딘지엠에 대한 기대를 접게 한 계기 중 하나로 알려진 바로 그 사진이다. 당시 케네디는 “이토록 감정을 뒤흔드는 보도 사진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는 후문이 있다.
61년 5월 사이공을 방문한 부통령 린든 존슨이 “아시아의 윈스턴 처칠”이라고 추켜세웠던 그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과 그의 일가는 틱광득의 분신 직후인 63년 11월 군부 쿠데타로 살해됐다. 쿠데타 배후에는 미 CIA가 있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저 사진의 배경에 담긴 베트남 시민들의 마음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는 독재자만 갈아치우면 인도차이나 반도의 상황이 잠잠해지리라 생각했다. 정권이 망쳐놓은 농지개혁과 농민들의 분노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와 맞섰던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전력과 사기도 알지 못했다. 60년대의 미국을 멍들게 한 베트남 전쟁이 이듬해 시작됐고, 브라운의 사진은 복잡하고 혼미했던 인도차이나 미시사를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한 상징으로 의미를 키워갔다.
2011년 주간지 ‘Time’ 인터뷰에서 브라운은 저 사진을 찍게 된 경위를 상세히 밝혔다. 간추리자면 당시 특파원들은 중대한 ‘항의 이벤트’가 있을 거라는 승려들의 연락을 받았는데,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반면 그는 현장에 나갔다는 거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응오딘지엠 일가(그의 형은 대주교였다)는 정권 초기부터 불교를 탄압했고, 불과 한 달 전인 5월 8일 석가탄신일에도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9명을 숨지게 하는 사건을 빚었다. 격한 항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던 때였다.
퀘이커 교도로 신앙심이 깊었던 브라운은 몇몇 승려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페트리(Petri)’라는 저가 일제 카메라를 들고 나간 걸 보면 그 역시 ‘중대 이벤트’가 뭔지는 몰랐던 듯하다. 분신 사진은 현장의 여러 사람이 찍었지만, 기자는 그가 유일했다. 트위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세상에 그 소식과 장면을 알릴 능력이 오직 그에게만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그 해 퓰리처상과 세계보도사진전 ‘올해의 스팟뉴스상’을 탔다.
한편 불교도들은, 화염에도 쓰러지지 않고 의연했던 틱광득 스님의 ‘법력’과 ‘불교 중흥’의 염원을 보기도 한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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