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찌뿌드드하고 정신이 어지러울 때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는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는 책을 펼친다. 어떤 책이어도 괜찮다. 당장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취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소리 내 읽기 시작한다. 단전에 힘을 주고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세심하게 발음하며 느릿느릿 읽어나간다. 비록 혼자라도 누구에게 읽어준다는 기분으로 또박또박 소리 낸다. 굳이 의미를 곱씹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뇌를 작동시키려 하기보다 오로지 입 밖으로 던져지는 소리의 물성에만 집중하면 더 좋다. 읽고 있는 문장이 뭘 얘기하고 있는지 귀 기울이기보다 방안에 울리는 소리가 어떤 느낌인지 되새기는 데 집중하는 게 훨씬 흥미로울 수 있다. 혀와 잇새에서 씹히는 단어는 알싸한 즙이 되고 공간에 울려 퍼진 문장들은 낯선 메아리가 된다. 눈으로만 읽을 때와는 왠지 다른 문장 같다. 머릿속으로 다지기만 했던 의미와는 또 다른 행간이 허공에 열리는 것도 같다. 혀가 풀리고 목젖이 열린 다음엔 문장의 톤에 맞춰 적절한 감정을 섞어도 된다. 웃긴 표현을 슬프게 읽고, 쓸쓸한 말을 우스개 던지듯 이죽거려도 재미있다. 쓰여진 것 뒤에 감쳐진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스스로 내뱉는 소리에 의해 그렇게 밝혀진다. 책은 우선 쓴 사람의 말이지만, 읽는 사람의 행동으로 변전될 때 종종 ‘악기’이 된다. 소리 내 보시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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