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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지금 천황을 부르는 이유

입력
2015.08.2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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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지난달 16일 중의원에서 가결된 안전보장법안을 둘러싼 찬반 여론이 뜨겁고, 지식인들에 의해 전쟁법안으로 명명된 안보법안 저지를 위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특히 전쟁에 동원될 가능성이 높은 젊은 세대들의 격렬한 반대운동이 눈에 띈다. 아베 총리는 8월 14일 담화에서 전쟁 책임을 말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철저하게 미국을 버팀목으로 삼은 그를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천황뿐이라는 의견이 아베를 반대하는 진영에서 흘러나왔다.

일본 천황은 헌법3조로 정치 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국가적 공식행사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천황의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화헌법 수호를 말했고 8월 15일에도 침략전쟁을 사과했다. 어쩌면 아베 정권이 천황의 태도를 바꿔놓은 셈이다.

아베 총리의 무리한 안보법안 추진은 보수 세력의 분열과 대립마저 가져왔다. 대표적인 우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신작 만화 ‘비겁자의 섬’은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지금 우익 쪽의 안보법안반대자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의 반대가 결코 과거의 침략전쟁을 사과하거나 천황제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지금 아베의 안보법안을 반대하는 우파나 진보세력 모두 천황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황의 힘이 크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동안 천황제에 비판적이던 진보 세력까지도 천황을 평화의 상징으로 포장하고 있다.

현존 천황의 평화헌법에 대한 신념은 확고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분위기가 일본제국 침략전쟁의 최고책임자였던 쇼와 천황의 미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영화 ‘일본의 가장 긴 하루’를 본 필자는 현존 천황과 쇼와 천황의 이미지가 뒤섞일 가능성을 예감했다. 아니 교묘하게 뒤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종전을 알리는 천황의 옥음방송 직전 24시간이 영화의 무대이다. 영화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저지하려는 육군 소장파 장교들의 쿠데타(궁성사건)를 물리치고 ‘종전’이 국민의 희생을 막으려는 천황의 ‘성단(聖斷)’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이처럼 천황의 전쟁책임 추구를 회피하고 육군의 전쟁책임을 묻는 서사 방식은 역대 전쟁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 주목할 점은 영화에서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천황이 배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천황을 실제 배역으로 만든 최초의 영화로서 일본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리얼리티가 배가된 그 영화가 만들어 낼 효과에 더 눈이 가는 것은 필자만의 과민한 생각일까.

지금 일본의 현실과 영화 ‘일본의 가장 긴 하루’에서 보이는 ‘천황’ 이미지에 강한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영화 ‘들불(野火)’의 육군 패잔병들의 모습이 중첩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가장 긴 하루’에는 말끔한 복장을 하고 소박하지만 정상적인 식사와 음주를 하는 지배층이 대거 등장한다. 공습이 격렬한 도쿄의 방공호에서도 세련되고 기름진 권력층들, 또 쿠데타를 도모하는 육군 엘리트들의 세탁된 깔끔한 복장이 그것이다. 이들의 청결함은 기아와 설사로 전신에 똥냄새를 풍기며, 식량 부족으로 약탈과 심지어 인육을 먹고 동료의 피까지 빠는 ‘들불’의 패잔병과 너무 다른 모습이다.

일본의 ‘영령(英靈)’은 어떻게 죽었을까. 아시아 침략 전쟁에서 일본 육군의 반 이상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 역사에는 식민지 조선인들도 포함돼 있다. ‘들불’에서 울려 퍼지는 일본 병사들의 처절한 비명과 그들에게 약탈당하고 그들의 식량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필리핀 민중들의 비명은 전쟁의 끔찍한 말로를 보여준다. 우리는 어쩌면 ‘일본의 가장 긴 하루’의 지배층 서사에 끌려 전쟁의 끔찍함과 범죄를 놓치고 있거나, 책임 소재를 흐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영란 일본 니혼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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