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선생의 손녀 최성주씨
본보의 최진동 장군 기사 보고 6촌 언니인 정선씨 집 찾아가
독립운동에 전재산 바친 일가, 광복 후 中정부 때문에 흩어져
"할아버지들 업적 함께 알릴 것"
“최운산 알아요? 제가 그분 손녀예요.” “운산 할아버지, 알지. 그럼 네가 봉우 삼촌 딸이야?”
20일 오후 인천 남동구의 한 반지하방. 오래된 기억을 더듬던 최정선(76)씨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던 6촌 혈육이 눈 앞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진동 장군(1883~1941)의 손녀임에도 어렵게 살고 있는 정선씨 사연을 전한 기사(본보 12일자 5면)를 보고 생면부지의 6촌 동생 최성주(58)씨가 수소문 끝에 그의 집을 찾은 것이다. 성주씨는 최 장군의 동생인 독립운동가 최운산 선생(1885~1945)의 손녀이다.
성주씨는 만나자마자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50년도 더 지난 가족사진을 꺼내 보였다. 흑백사진 속에서 둘째 할머니를 금세 찾아낸 정선씨는 “네 아버지(최봉우)는 어렸을 때 봐서 어렴풋한데 할머니는 기억이 난다. 둘째 할아버지 내외가 살던 봉오동 저수지 앞쪽 집도 눈에 선하다”며 손뼉을 쳤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내 할아버지들이 활동했던 1920년대 만주로 옮겨졌다. 중국 지린(吉林)성 봉오동에 모여 살던 최진동ㆍ운산ㆍ치흥 삼형제는 토성을 쌓고 골짜기를 개간해 연병장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사재를 털어 구입한 무기로 ‘군무도독부’를 창설한 뒤 600여명의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이런 공로로 최 장군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최운산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성주씨는 “큰 할아버지는 총사령관을 맡았고 우리 할아버지는 이름을 7개나 바꿔 쓰면서 일본군의 침략정보를 독립군 본부에 알리는 첩보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공장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댄 것도 운산의 몫이었다. 그는 “할아버지들뿐 아니라 할머니들은 봉오동에 주둔한 독립군의 끼니를 챙기고 빨래 등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셨다”며 “우리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독립군이 가장 많았을 땐 한 끼에 3,000명 분의 밥을 지으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일가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광복 무렵 이들 가족에게 남은 것은 피란민의 신산한 삶뿐이었다. 광복 후 최 장군의 재산이 중국 정부에 몰수되면서 정선씨 가족은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최운산 선생 식구들도 다르지 않았다. 운산은 큰 아들(최봉우)이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간첩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었고 부인과 큰 아들만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평양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그 후 6ㆍ25 전쟁이 터져 남은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성주씨도 부산에서 태어났다. 반면 정선씨는 봉오동에서 태어나 200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인근 석현에서 평생을 살았다. 이들이 6촌 지간이면서도 생사는커녕 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까닭이다.
성주씨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평양으로 떠난 뒤 중국에 남아있던 삼촌, 고모들과는 1980년대 초반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겨우 재회할 수 있었다”며 “우리 친척들 못지 않게 정선 언니네 가족도 중국에서 힘든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평생을 모르고 살아 온 가족이라 아직은 어색할 법도 하지만 독립운동가의 손녀들은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들을 떠올리며 두 손을 굳게 잡았다. 6촌 자매는 앞으로 할아버지들의 업적을 한국사회에 더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정선씨는 “우리의 가족사가 곧 민족의 역사인데 이 기억을 함께 할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났으니 다행”이라며 웃었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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