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71) 전 총리가 24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2010년 7월 검찰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한지 5년여만인 지난 20일 대법원이 징역 2년 실형을 확정했다. 국무총리와 두 번의 장관을 역임하고 제1야당을 이끌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여성정치인. 하지만 헌정 사상 최초로 실형을 사는 전직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한 전 총리의 영욕의 세월을 돌아봤다.
여성운동의 대모, 정계 입문하다
한 전 총리는 정치입문 전 재야 여성 운동의 대모로 이름을 알렸다.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3년 간 옥바라지를 한 것을 계기로 사회 운동에 투신했다. 1979년 유신 말기 공안조작 사건인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에 휘말려 본인도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한국여성민우회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부회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등을 지내며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전국구 의원에 발탁돼 정치에 입문했다.
한국 첫 여성총리… 꽃 피는 정치인생
초대 여성부 장관(2001년), 환경부장관(2003년), 첫 여성 국무총리(2006년)….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인 업무스타일을 내세운 한 전 총리는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고양일산갑에 출마해 당시 5선의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는 등 대중적 지지도 확보했다. 시민사회 및 정치·행정 분야의 다양한 경험은 한 전 총리가 야권의 대표적인 여성정치인으로 세를 굳히는 데 도움이 됐다.
두 번의 낙선 , 두 번의 기소
승승가도를 달리던 한 전 총리는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선 오세훈 전 시장에게 근소한 차로 패했다. 낙선과 함께 검찰과의 악연도 시작됐다. 2009년 곽영운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미화 5만달러를 수수한 혐의로 기소됐고, 2013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2010년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9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다시 기소됐고, 1심에선 무죄 항소심에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8대5의 의견으로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2년에 추징금 8억8,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기사보기)
법적공방 끝났지만 정치공방 여전
한 전 총리가 구속되면서 이번 사건을 둘러싼 5년여간의 법적 공방은 끝났지만, 정치적 공방은 계속되고 있다. 한 전 총리는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결백을 주장해왔다. 검찰이 별건의 두 사건을 잇따라 기소하며 표적수사를 벌였다는 얘기다. (▶기사보기) 이 때문에 대법원의 판결을 두고 새누리당은 "정의가 실현됐다"고 평가한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명백한 정치탄압"이라고 반발해왔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던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가 한 전 총리의 구속 전 배웅 자리에 불참하면서, 야권에서도 '거리 두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기사보기)
백합과 함께… 마지막까지 결백 주장
"저는 결백하다. 그래서 당당하다. 굴복하지 않겠다. 당당히 어깨를 펴고 여기 함께한 여러분의 체온과 위로를 느끼며 들어가겠다." 24일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 앞, 한 전 총리는 지지자들이 건넨 '백합'을 받아 들고 수감 전 소감을 밝혔다. 백합은 '청렴'을 상징한다. 한 전 총리는 구속 전 마지막 주말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잇따라 참배했다. 이는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화려하게 비상했던 한 전 총리의 정치적 날개는 꺾였다. 한 전 총리는 수감 전 지지자들을 향해 “어떤 형태로든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며 “잊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겼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