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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군대가 필요하다면 뭐든 주시오, 미국 청년들 목숨 값이니"

입력
2015.08.2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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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기고 자처한 미국, 무기대여법 제정해 연합국 지원

5년여 총력전 승리 이끈 원동력

2차대전 당시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위치한 군용기 조립공장. 미국의 막강한 생산력을 한눈에 보여 준다.
2차대전 당시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위치한 군용기 조립공장. 미국의 막강한 생산력을 한눈에 보여 준다.

일본 함대가 하와이에 모여있는 미국 태평양함대를 기습하기 8개월 전인 1941년 3월 11일에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흔히 무기대여법이라고 불리는 ‘미합중국 방위 촉진 조례’에 서명했다. 유럽의 전쟁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공약을 하고 3연임에 나선 194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지만, 루스벨트는 어떻게든 파시즘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미국 젊은이들을 바다 건너 싸움터로 보내지는 않을지라도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고’ 역할을 맡아 연합군에 무기와 물자를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쟁 개입의 도화선이 될까 걱정해서 지원에 반대하는 여론에는 이렇게 대응했다. “옆집에 불이 난 위기에서 어찌해야 할까요? 저는 이웃에게 내 정원 호스가 15달러니까 호스를 빌리려면 15달러를 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단 불을 끈 다음에 호스를 돌려받으면 됩니다!”

이런 대국민 소통이 효과를 발휘해 무기대여법이 의회를 통과했고, 루스벨트는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한 영국에 대통령 직권으로 군수물자를 퍼주기 시작했다. 퍼도 퍼도 재화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화수분 같은 물량 지원은 4월에는 중국으로, 9월에는 소련으로 확대되었다. 고기통조림에서 탱크와 비행기에 이르는 갖가지 물자가 바다와 산맥과 사막을 지나 동맹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1941년 3월부터 1945년 9월까지 미국이 동맹국에 지원한 물량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무려 500억달러(오늘날 가치로 6,600억달러)이며, 미국이 지출한 전쟁 비용 총액의 17%에 해당한다. 혜택을 가장 많이 얻은 나라는 314억 달러어치를 받은 영국이었고, 113억 달러어치를 받은 소련이 뒤를 이었다. 장제스(蔣介石 )가 이끄는 중국은 16억달러 어치, 나머지 동맹국은 26억달러 어치를 받았다. 달리 말해, 무기대여법 혜택의 3분의 2는 영국, 5분의 1은 소련, 나머지 자투리는 중국 등에 주어진 셈이다.

퍼주는 미국으로서도 꼭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1929년의 대공황으로 쓰러졌다가 뉴딜정책이라는 인공호흡을 받아 살아났다지만 1940년대 초까지도 미국 경제는 여전히 누워서 가쁜 숨을 내쉬는 환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에게는 일종의 ‘축복’이었다. 처음에는 동맹국에 줄 물량을, 나중에는 직접 싸움터로 나선 미군이 쓸 무기와 물자를 만들어내면서 미국의 공업이 완전가동 상태에 들어갔고 덕분에 실업자가 사라졌다. 미국이 병석을 훌훌 털고 일어난 계기는 다름아니라 막대한 전쟁 수요였던 것이다.

물론, 산업생산능력이 더 큰 나라의 군대가 싸움터에서 그렇지 못한 나라의 군대에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영미군이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독일 아프리카군단에게 쩔쩔 맨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총력전이 한두 해도 아니고 다섯 해 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누적적으로, 경향적으로 승패의 향방을 결정하게 된다. 섬나라 영국으로서는 무기대여법으로 미국이 제공하는 물자를 안전하게 자국 항구로 수송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독일로서는 대서양 양쪽을 잇는 보급선을 끊어야 영국의 무릎을 꿀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양국의 싸움은 영국의 화물선을 노리는 독일 잠수함과 이를 막는 영국 함대의 숨막히는 대결이 핵심에 놓이게 됐다.

무기대여법이 연합군 승리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는 냉전시대에 논란거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국제 정치의 양대 주역이 된 미국과 소련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유럽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사투를 벌이던 소련에게 미국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준의 군수물자를 지원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기대여법이 소련의 승리에 얼마나 결정적인 이바지를 했냐는 문제를 놓고는 입씨름이 벌어졌다. 미국은 무기대여법이 아니었다면 붉은 군대는 무기와 물자가 부족해서 독일군에게 승리하지 못했을 거라며 무기대여법의 의의를 치켜세웠다. 소련은 소련대로 전쟁 기간에 붉은 군대가 소비한 전쟁물자 총량 가운데에서 미국에게서 받은 전쟁물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에 지나지 않는다며 무기대여법의 의의를 깎아 내렸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뒤에는 오가던 날 선 공방이 많이 누그러졌다. 무기대여법이 소련의 승리에 결정적인 이바지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역사학자가 많다. 그러면서 그 보조적인 역할이 때로는 실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지원의 규모가 아니라 효율을 더 눈여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통신설비가 그렇다. 지상전의 주역이 된 장갑차량의 성능면에서 소련은 독일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 군대는 제대로 된 통신설비를 갖추지 못한 탓에 기갑부대 운용에서 취약점을 보여 패전을 거듭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기대여법으로 소련에 보급된 미제 통신설비를 활용한 붉은 군대는 전투 능력을 크게 키워 독일 기갑군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되었다.

1942년 여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마차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다. 반면 소련군은 미군 트럭을 지원받아 수송능력에서 독일을 압도했다.
1942년 여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마차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다. 반면 소련군은 미군 트럭을 지원받아 수송능력에서 독일을 압도했다.

더 결정적인 요소는 수송 장비였다. 적군 전선을 휘저어 궤멸 상태에 빠뜨리는 독일군의 선봉은 기계화된 각종 차량을 갖춘 현대화된 부대였지만, 그 뒤를 따라가는 독일의 일반 부대는 터벅터벅 걸어서 움직이고 무거운 장비와 물자는 말로 옮기는 19세기형 군대였다. 1941년 여름과 가을에 소련 영토를 짓밟은 400만 병력의 침공군은 탱크 4,000대를 앞세워 전진했지만, 물자 운송은 대부분 말 75만마리로 이루어졌다. 이런 탓에 진군 속도에서 1941년 독일군은 1812년 나폴레옹의 군대보다 뒤처졌다. 말하자면, 2차대전에도 독일군의 기본 수송수단은 말이었던 셈이다.

소련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미국의 디트로이트에서 쏟아져 나와 바다 건너 소련에 도착한 미제 트럭은 동부전선에서 힘의 균형을 깨뜨렸다. 말 5,000마리를 동원해 1개 보병사단이 이동하는 독일군과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미제 트럭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고 태산 같이 쌓인 물자를 나르는 소련군의 운송수단의 차이는 갈수록 전투력 격차로 이어졌다. 독일 병사를 공포에 몰아넣는 소련군의 자랑거리 다연발 로켓 발사장치 카튜샤도 미제 트럭에 달려 전선을 돌아다녔고, 드넓은 러시아 평원 곳곳에 물자를 나르는 열차를 구동하는 것도 미제 기관차였다. 이처럼 무기대여법으로 미국이 소련에 제공한 전쟁물자는 양이 아니라 질로 붉은 군대의 취약점을 메워주었고,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전쟁 지도자도 사석에서는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전시 동맹국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무기대여법이 등장하고 작동하는 정확한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 한 군사전문가는 무기대여법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은 그 특유의 뻔뻔스러움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영국과 미국을 향해 마치 ‘맡겨놓았던 것처럼’ 당당하게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 등, 온갖 종류의 지원을 요구해왔던 것이다… ‘미국은 왜 전차 제조용 특수 강판을 월 1,000만톤 밖에 보내주지 않는 거요? 당신들의 생산 능력이 월 5,000만톤쯤 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소.’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스탈린을 은혜도 모르는 자로 본 것이다.

스탈린이 동맹국의 물자를 얻어다 쓰는 처지에 왜 이리 고자세일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오랜 지기이자 조언자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 대사를 지낸 애버렐 해리먼은 나중에 한 저널리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스벨트가 바란 바는, 그리고 저도 절대 찬성한 바인데, 붉은 군대가 히틀러의 군대를 충분히 쳐부숴주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직접 독일군과 상대하는 무시무시한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우리가 독일군 손에 당한 엄청난 손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우리나라 군대가 그런 출혈 사태에 다시금 처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따라서, 내 임무는 스탈린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주어서 붉은 군대가 히틀러 군대와 계속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여러 해 동안 독일군과 싸운 미군 사망자 수는 10만명을 살짝 웃돈다. 이 수치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막판에 참전해 독일과 단 몇 달 싸우다 생긴 미군 사망자 수와 엇비슷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이 소련의 붉은 군대와 싸우지 않고 막강한 전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팔팔한 독일군을 상대했다면, 미국으로서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나는 천문학적인 수준의 인명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국은 자국의 풍부한 돈과 물자를 내고 소련은 자국 젊은이의 피와 목숨을 바쳐서 공동의 적 독일과 싸우는 일종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스탈린은 미국에게서 물자를 얻어 싸우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루스벨트는 미국 젊은이의 피와 목숨을 아끼는 수지맞는 장사를 한 셈이다.

류한수 (상명대,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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