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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전후' 프레임에 갇힌 한국… 식민·냉전사관부터 걷어내야

입력
2015.08.2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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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군국주의 세력 전후에도 군림

친일파와 '반공 슬로건' 손잡아

냉전 붕괴·한국 민주화로 체제 흔들

진정한 해방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

‘해방’ 70주년을 맞은 올해 광복절의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입이었다. 8월14일 저녁 아베는 일본의 ‘전후’ 7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담화에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얼버무리고 우리의 ‘해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시당한 한국인은 분개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과거형 사죄를 통한 물타기와 ‘유체이탈’ 화법, 궤변으로 얼룩진 아베 담화를 계기로 우리는 역사 수정주의로 돌아선 일본의 민낯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런 일본에 대해 미국은 노골적으로 칭찬했고, 당초 단호한 듯했던 한국 정부는 미국의 눈치라도 살피는 듯 끝내 어정쩡하게 물러섰다. 이번 아베 담화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보인 태도야말로 한일관계가 여전히 일본이 그려온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의 ‘해방’ 70년은 일본의 ‘전후’ 70년 프레임에 의해 또다시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3년 10월 27일 일본 자위대의 날을 맞아 도쿄 북부 아사카(韓霞)기지에서 자위대 사열 중 2차대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욱일승천기에 경례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3년 10월 27일 일본 자위대의 날을 맞아 도쿄 북부 아사카(韓霞)기지에서 자위대 사열 중 2차대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욱일승천기에 경례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패하고도 졌다고 말하지 않아 온 일본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지만 패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패전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어에 가까웠다. 대신 일본은 ‘종전’이라고 애매하게 말해왔다.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고 강화조약에 서명했으면서도 패전을 부인하는 후안무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聰)에 따르면 패전을 종전으로 바꿔치기 하는 자기 기만극이 벌어진 것은 뻔히 질 줄 알고도 전쟁으로 몰아간 군국주의 세력이 패전의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전후에도 군림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패전 직후 일시적으로 대두됐던 천황의 전쟁 책임을 군부의 책임으로 떠넘기더니 이것이 “천황폐하에 정말 죄송하다”는 ‘일억총참회론’(一億總懺悔論)으로 발전하면서,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기만극이 완성됐다. 여기에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원폭을 당했다는 피해의식이 가미되면서 일본은 어느덧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거듭 났고, 평화주의라는 허상이 이를 정당화했다.

패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으므로 일본의 전쟁 책임자들은 전후에도 일본의 정재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은 미일 합작에 의해 만들어졌다. 냉전이 고개를 들자 미국은 소련, 중국에 대항할 하위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고,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 면죄부를 줬다. 한국과 대만이라는 전초기지가 공산주의에 맞서 일본을 지켜주는 가운데 일본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했다. 어느새 ‘연합국=전승국’인 소련과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선 ‘전후’ 일본은 전전(戰前) 체제를 답습하고 있는 스스로의 일그러진 모습조차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으로선 ‘종주국’ 미국에만 확실히 패전을 인정하면 될 일이었다. 그 대가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 대해선 냉전의 논리에 기생하면서 축적한 자본으로 과거사를 봉인하고 패전을 부인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일 국교정상화로 성립된 이른바 ‘1965년 체제’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베가 표방한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脫却)’은 일종의 이중적인 자기기만에 해당한다. ‘전후’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미국에 대해서도 패전을 부인하는 ‘뻔뻔함’을 보이면서 대미 종속에서 독립해야 한다. 하지만 아베가 선택한 것은 미국과 선을 긋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을 등에 업고 아시아와 맞서는 것이다. 이는 ‘전후’ 체제의 탈각은커녕 노골적으로 ‘전후’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시아에 대한 패전을 부인하기 위해선 대미 종속을 계속할 수밖에 없고 대미종속이 지속되는 한 패전의 늪에 점점 빠질 수밖에 없는 ‘전후’ 일본을 시라이는 ‘영속 패전(永續敗戰)’이라고 비꼬았다.

서울시민들이 2013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서울 보신각 앞에서 광복절 기념 UCC 촬영을 위해 일제 강점기 복장을 하고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시민들이 2013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서울 보신각 앞에서 광복절 기념 UCC 촬영을 위해 일제 강점기 복장을 하고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해방’을 말하면서도 부인해온 한국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의 어긋난 ‘전후’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해방 후 한일관계는 미국과 일본이 설정한 ‘전후’ 체계의 하부체제로서 기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해방의 전제조건인 식민사관 극복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이 ‘전후’에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배에 부역한 친일파가 해방 후에도 부와 권력을 유지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은 1948년 탄생 이래 단 한차례도 일본에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하지도, 그 불법성을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해방’은 어디까지나 국내용 구호에 불과했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해방’의 논리를 부인함으로써 미일이 주도하는 ‘전후’ 체제에 편승해왔다. 시라이의 ‘영속 패전’ 개념을 원용한다면 한국은 해방은커녕 ‘영속 식민’의 모순구조 속에 스스로를 가둬왔다.

이런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전전 세력, 즉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한국의 친일파 세력은 반공이라는 슬로건 하에 손을 맞잡았다. 불편했던 과거사는 북한과 중국, 소련이라는 공통의 적에 대항한다는 냉전의 논리와 산업화라는 명목 하에 모든 것을 삼켜버린 경제의 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파묻혔다. 과거사에 관한 한 한일 정권은 ‘공범’ 관계였고, 이를 ‘전후’ 체제의 막후 설계자 미국이 안전보장과 미래지향이라는 명분으로 적극적으로 조장해왔다.

하지만 일본이 주도해온 ‘전후’ 체제는 1980년대 후반 냉전의 붕괴와 한국의 민주화 이후 타격을 받고 있다. ‘전후’ 체제는 국제적 냉전구조와 아시아에서의 일본 경제력의 돌출성에 의해 가능했는데, 냉전은 무너졌고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쇠퇴했다. 이와 더불어 민주화한 한국의 민중들이 한일 양국 정부가 봉쇄해온 기억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고 과거사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후’ 체제 하에서는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전후’ 체제의 하청업자 신세를 면치 못했던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여기에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의 안보우산마저 흔들리면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일관계가 어긋난 이유가 한국이 “골대를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솔직한 이유는 한국이 군사적, 경제적 위협인 중국과 친하게 지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나온 아베 담화는 일본이 구가해온 왜곡된 ‘전후’를 어떻게든 존속시켜 보겠다는 발버둥에 가깝다. 그 배경에는 물론 중국과 북한이라는 위협국가와 맞서야 한다면서 동맹국들에게 선택을 강요한 미국의 전략적 의도가 있다.

우리 안의 식민사관과 냉전사관부터 걷어내야

해방을 짓눌러온 일본의 ‘전후’ 체제와 이에 기초한 한일관계의 앞날은 아슬아슬하다. 왜냐하면 어떻게든 ‘전후’에 남고 싶어 하는 일본의 인식이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특히 한국에 대해선 거의 안하무인일 정도로 오만해졌기 때문이다. 아베 담화에서도 드러났듯이 일본의 ‘전후’ 세력은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기존의 ‘합법부당론’ 보다도 후퇴한 합법정당론을 노골적으로 표방했다. 아베가 한국인 징용자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강제성’을 부인하는 것도 식민지배가 합법적이었을 뿐 아니라 정당했다는 왜곡된 역사관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같은 일본 ‘전후’ 세력의 인식은 어쨌든 끊임없이 해방을 지향해온 한국의 민족주의와 충돌이 불가피하다.

“서둘러 군비를 정비해……캄차카와 오키나와를 빼앗고……조선을 압박해 인질과 공물을 바치도록 하고, 북으로는 만주를 할양 받고, 남으로는 대만, 루손 제도(필리핀)를 취해야 한다.” 아베가 정신적 지주라고 공언해온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대표 저서 ‘유수록’(幽囚錄)을 통해, 그리고 사설 학원이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이렇게 선동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그의 제자들은 테러 행위도 불사하며 권력을 잡고 이를 하나하나 실행에 옮겨나갔다. 최근 아베가 메이지(明治)유신 산업화의 상징이라면서 은근슬쩍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끼워 넣는데 성공한 쇼카손주쿠는 제국(帝國)일본의 침략주의의 본산이자 한반도 침략의 지휘소였다. 이들에게 한반도 병합은 침략은커녕 ‘구토(舊土) 수복’이었다. 스스로 조슈인(長州人)의 적통이라고 자부해온 아베가 담화에서 드러낸 ‘한국 무시’는 결코 외교적 실수가 아니었다. 한국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의식과 국수(國粹)주의는 아베 정치의 유전자이자 혼네(本音, 진심)인 것이다. 침략주의라는 본모습을 가린 채 ‘봉건제 국가를 하룻밤에 합리적인 근대국가로 만든 메이지유신’을 높게 평가하는 시바 료타로 사관에 푹 빠져온 현대 일본은 이런 아베의 독주를 방조하고 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모순으로 점철된 일본의 ‘전후’ 사관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야 유지될 수 있는 냉전의 부산물이었다. 평화주의에 포장되어 정체를 숨겨온 이 부산물은 이제 침략으로 얼룩진 과거사를 송두리째 부인하고 새롭게 독선적인 역사를 쓰겠다고 나섰다. 결국 우리의 해방은 왜곡된 일본의 ‘전후’ 사관마저 각성시키고 치유해 안고 가야 하는 힘든 싸움일 수밖에 없게 됐다. 그 실마리는 물론 우리 안의 식민사관과 냉전사관을 걷어내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해방 70년을 맞은 올해, 우리는 해방의 참뜻을 구현하기 위해선 갈 길이 참으로 멀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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