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명 탄 파리행 고속열차서 AK-47 든 괴한 맨손으로 제압
공군 의료요원·군인·대학생… 유럽 여행 중학교 동창, 영웅으로

미국인 청년 3명이 프랑스 파리행 고속 열차 안에서 총기 테러를 시도하려던 괴한을 저지해 대형 인명피해를 막아 영웅으로 떠올랐다. 괴한은 지난해 시리아를 방문해 수니파 급진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와 연관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슬람 극단주의에 경도돼 시리아로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유럽인들에 대한 경고음이 높아지고 있다.
사건은 21일 오후 5시 45분(현지시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파리로 향하던 승객 554명을 태운 탈리스 고속열차 객실 내에서 벌어졌다. 12번 열차 칸의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한 프랑스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서다 어깨에 AK-47 자동소총을 맨 아유브 엘 카자니(25)를 우연히 발견했다. 승객이 그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카자니의 권총이 발사됐고,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총성을 들은 3명의 미국인 청년들은 객실로 들어서는 무장한 카자니에 맞섰다. 미 오레곤 주 방위군 소속 알렉 스카라토스(22)는 카자니를 발견하고는 미 공군 소속 스펜서 스톤(23)에게 “스펜서, 가자!”라고 외쳤다고 22일 프랑스 아라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대학생인 앤서니 새들러(23)와 함께 셋은 카자니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스톤은 포르투갈 근처 아조레스 제도의 라예스 공군기지에서 응급 의료 요원으로 복무 중이었고 스카라토스는 9개월간의 아프가니스탄 복무를 끝내고 지난달 집으로 돌아왔으며 새들러는 새크라멘토 주립대학에서 신체운동학을 전공하는 의사 지망생이었다. 중학교 동창인 이들은 함께 유럽여행에 나선 길이었다.
가장 먼저 스톤이 비무장인 채로 카자니에게 달려들었다. 10여m를 뛰어간 그는 카자니의 목을 잡고 공격했다. 카자니는 칼을 꺼내 격렬하게 저항했고, 스톤은 목과 손을 크게 베었다. 스카라토스는 카자니의 권총을 빼앗아 옆으로 던졌고, 새들러는 60대의 영국인 컨설턴트 크리스 노먼과 함께 카자니를 붙잡고 넥타이로 묶었다. 승객 가운데 프랑스 영화배우 장 위그 앙글라드가 유리를 깨고 비상벨을 울리자 기차는 뒤늦게 속력을 줄였다.
스톤은 엄지손가락이 거의 절단될 만큼 베인 상황에서도 부상당한 승객들을 도왔다. AK-47을 빼앗은 스카라토스는 다른 무장괴한들이 남아 있는지 객실들을 뒤졌다. 스카라토스는 “괴한이 자동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운 좋게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고 말했다. 이날 총격으로 스톤과 목 부분에 총상을 입은 승객 등 3명이 다쳤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자칫하면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을 막은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전세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프랑수아 올란드 프랑스 대통령은 카자니를 제압한 이들을 파리 엘리제궁으로 초청해 사의를 표하겠다고 밝혔다. 아라스 지역 당국은 이들 4명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도 대변인을 통해 “몸을 아끼지 않고 카자니를 제압한 미군을 비롯한 승객들의 용기와 빠른 판단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한편 총격범 카자니는 IS에 가담하기 위해 시리아로 여행을 떠났다가 불과 석 달 전 유럽으로 돌아와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외신들이 22일 보도했다. 모로코 출신인 그는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등에서 생활해왔으며, 지난해 터키를 거쳐 시리아를 여행했다. 이 기간에 IS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소식통에 따르면 카자니는 지난 1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테러가 일어난 다음 벨기에 동부 베르비에에서 테러 공격을 시도하다 사살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위험인물로 지목되었던 카자니는 그러나 시리아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후 별 제재 없이 범행에 쓸 무기를 모을 수 있었다. 그는 탈리스 고속열차에 탑승할 당시 AK 자동소총 1정, 루거 자동권총 1정, 탄창 9통 등 최소 200여명을 사살하기에 충분한 양의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영국 가디언은 최근 전문가들이 시리아 등에서 IS의 훈련을 받은 테러리스트들이 유럽으로 돌아오는 ‘블로우백(blowbackㆍ본국 역유입)’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의 경찰조직인 유로폴 대변인은 이 ‘블로우백’이 “유럽이 9ㆍ11 테러 이후 직면한 가장 심각한 테러리스트 위협”이라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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