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위정자들의 불의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법치를 강조하던 입으로 헌법을 무시하며 대놓고 ‘역사세탁’에 나선 형국이다. 하기야 돈 세탁도 하고 이념도 세탁하는데 역사라고 하여 세탁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리라. 저들이 돈이나 이념을 세탁하는 까닭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역사 세탁도 마찬가지다. ‘역사 바로 세우기’니 ‘애국’이니 부르대지만 실상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충하기 위함이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리게 되면 손해가 될 수도 있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역사 조작에 성큼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역사를 보면 불의한 자들이 역사를 자기 뜻대로 장악하려 했던 시도가 적지 않다. 그런 이들은 영혼에 역사의 참된 가치를 애써서 품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역사를 보며 현재를 성찰하고 선한 미래를 기획했던, 그러한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여 그들의 역사 장악 의도는 청사(靑史)에 자기 이름을 아름답게 남기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아생전에 더 큰 이득을 얻어 더 누리며 살기 위해서였다.
이는 ‘먹고 사는 데 뭔 도움이 되는데’ 하며 역사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지금의 세태와 선명하게 대조된다. 아니, 역설적이지만 역사세탁은 그래서 시도될 수 있었다. 역사에 대한 무시에 가까운 무관심이 지속됐기에 역사세탁이 버젓이 행해질 수 있었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밝히 일러주듯, 역사는 자신을 무시하는 이들을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무시당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저 옛날에만 그러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를 일상적으로 무시하기에 저들은 참으로 당당하고도 의연하게 친일을 미화하고 독재를 상찬하고 있다는 것이다.
‘논어’에는 “민(民)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만 이해함을 뜻하지 않는다. 공자는 행할 줄 알아야 비로소 아는 것이라고 보았다. 가령 효(孝)의 개념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행할 줄 모른다면 실은 효를 모르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이 공자가 말한 참된 앎인데, 문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수밖에 없는’ 백성이 그런 앎을 지닌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자는 지배층이 참된 앎으로 백성들을 따르게 하여 그들도 인간답게 살도록 교화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공자의 성인다운 풍모와 헤아림을 목도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정반대로도 읽힐 수 있다. 문면 그대로 해석하면 우민론의 색채가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구절은 “백성은 어차피 알게 할 수 없는 존재니 그저 따라오게만 하면 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여 성인 공자라는 상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발언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역사는 막상 어떠했을까?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금-여기’의 우리 상황은 이 말과 얼마큼이나 떨어져 있을까? 불의한 위정자가 이념으로 편을 가르고 지역으로 국민을 쪼개며 일자리로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지금, 우리 모습은 공자의 이 언급과 과연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정이 이러하니, 사악한 위정자에게 민중은 얼마나 우습게 보일는지….
17세기 무렵, 이민족 왕조인 청조와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던 고염무(顧炎武)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한 정치집단이 망한 책임은 그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만 물으면 되지만, 세상이 패악으로 물들어 망해감은 그 세상을 산 이들 모두가 져야 하는 책임이라고. 그가 살았던 시대는 황제와 조정의 관리들만 정사에 참여할 수 있던 때였다. 반면에 우리는 위정자를 우리 손으로 직접 뽑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저들이 공공연하게 헌법을 무시하며 떳떳하게 역사를 세탁할 정도로 세상은 불의로 가득하다. 그 책임이 과연 저들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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