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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훈] '맨인블랙'처럼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입력
2015.08.21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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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에 대한 것은 아직도 많은 것들이 미스테리이고, 관련 연구에 대한 결과나 해석도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들이 무척이나 많은 분야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근의 뇌과학과 기억에 대한 연구와 이에 접근하는 미래기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하는 것과 관련한 기억의 과학과 미래기술에 대한 것이다.

● SF영화 속에서의 기억삭제, 그리고 조작

SF영화 속에서는 기억을 삭제하거나 조작하는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영화 맨인블랙(Man in Black)에서 외계인을 본 사람들의 기억을 삭제하고 조작하는데 사용되는 뉴랄라이저(neuralyzer)라는 기계를 들 수 있다. 손에 들고 다니는 막대처럼 생겼는데, 밝은 붉은색 빛을 대상자에게 반짝이면 이 빛에 노출된 사람은 즉시 최근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약간의 혼돈상태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말을 듣고 이를 가짜 기억으로 가지게 된다. 이 빛에 노출되어 기억이 삭제되고 조작되지 않으려면 특수제작된 선글래스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인 윌 스미스와 토미 리 존스가 이런 선글래스를 함께 끼고 다닌다.

맨인블랙에 등장하는 기억을 삭제하고 조작하는 기계
맨인블랙에 등장하는 기억을 삭제하고 조작하는 기계

매트릭스에도 기억에 관여하는 장면이 나온다. 네오가 매트릭스에 들어가기 위해서 날카로운 플러그를 두개골 아래 부분에 삽입하는데, 이후 다양한 기억을 업로드 하면서 쿵후 등을 자연스럽게 익히기도 한다.

● 인간의 기억에 대한 진실

인간의 기억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많지만, 현재까지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몇몇 과학적 사실들을 먼저 간단히 알아보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기억이 단기기억(또는 작업기억)과 장기기억이라는 크게 2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단기기억은 해마(hippocampus) 지역이 주로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기기억은 대뇌 전반에 산재되어 있고, 기억을 회상하려고 할 때 활성화된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뇌과학 연구결과가 밝혀낸 것이다. 또한, 인간은 감정에 따라 경험과 기억의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이는 편도체(amygdala)라고 부르는 뇌의 부위가 인간의 기분에 따라 기억을 처리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기억을 쉽사리 떨쳐버리기 어려우며 당시의 영상을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비해,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경험들은 시간과 함께 쉽게 잊혀지며 기억이 난다고 해도 희미하게 조각조각 떠오를 뿐이다.

그 중에서 장기기억과 관련한 내용은 최근 들어 크게 변화된 이론이 있다. 현재 뉴욕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다니엘라 실러(Daniela Schiller) 박사팀이 2010년 네이처지에 발표한 논문을 시작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재강화(reconsolidation) 이론’이 그것이다. 기존의 이론은 기억이 일단 조직화되어 뇌에 저장이 되면 바뀌지 않는다는 것으로, 지난 수십 년간을 지배했던 이론으로 이를 강화가설(consolidation hypothesis)이라고 한다. 2000년 사이언스지에는 제임스 L. 맥고(James L. McGaugh)의 "기억 - 강화의 세기 (Memory - A Century of Consolidation)" 이라는 리뷰 논문이 실렸는데, 강화가설이 이렇게 오랜 동안 정설로 지켜지면서 장기기억의 생물학적 프로세스에 대한 기초연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믿어왔던 장기기억의 동작원리에 대해서, 변화된 재강화 이론은 어떤 이벤트를 사람들이 회상할 때마다 기억이 변형되고 새롭게 쓰여진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특히 일부의 동물실험에서의 증거를 가지고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실험을 통해 그 가능성을 입증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연구에서 실러 박사팀은 트라우마나 불행한 이벤트가 회상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적절하게 이를 완화시킬 수 있는 정보가 들어가면 수 시간 동안 뇌가 기억을 재구축하게 되고, 기억의 감정적인 경험이 근본적으로 다시 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영화 '이터널 션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는 장면
영화 '이터널 션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는 장면

재미있는 것은 새로운 연구결과를 낸 다니엘러 실러 박사가 2004년 영화 이터널 션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라는 영화를 보면서 젊은 남자가 과거 여자 친구와의 고통스러웠던 이별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약을 복용하던 장면을 인상 깊게 봤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장면이 뉴욕대학교 조 르도(Joe LeDoux) 교수의 연구에 기반을 둔 영화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 이것은 잘못된 사실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기억에 대한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대학에 박사후 연구를 지원했다고 한다. 영화가 과학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 어떻게 하면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그리고 조작은 가능한가?

스웨덴 업살라 대학(Uppsala University)의 토마스 어그렌(Thomas Agren) 팀은 인간이 공포기억을 새롭게 떠올릴 때 재강화 과정을 붕괴시키면 공포효과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팀은 뇌영상 촬영을 통해 이런 기억의 변화가 나타나는 위치가 편도체(amygdala)라는 것도 알아냈다. 또한 끔찍한 경험을 한 뒤에 일정 약제를 몇 시간 내에 복용하면 이런 공포스런 기억이 비교적 덜 남게 된다는 연구결과도 최근 발표가 되고 있다.

어쨌든 거의 모든 기억이 재강화에 의해 새롭게 업데이트가 되는 것이라면, 이는 기억은 파일처럼 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회상할 때마다 얼마든지 변경이 되고 조작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장된 기억 데이터끼리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이 과정에서 기억들이 섞이거나 재창조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거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변화가 누적된 현재의 자기 자신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기억 업로드를 통해 쿵후를 익히는 장면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기억 업로드를 통해 쿵후를 익히는 장면

이런 이론적인 배경을 이해하면, 즐거운 기억을 오래 기억하도록 하는 비법도 고안할 수 있다. 즐거운 기억과 연결된 다양한 기억을 타래처럼 엮어서 재강화가 잘 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면 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일종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 가서 너무나 아름다운 오름의 모습을 보고 정말 멋진 경험을 했다고 하자. 이를 오래 기억하려면 오름에 오르는 동안에 뭔가 인상적인 것들을 더 보았고, 누구와 올랐으며, 오른 뒤에 내려와서 무엇을 먹었는지 등과 같이 해당 기억의 편린이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연결고리들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종종 꺼내고 다시 강화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기억과 관련한 과학적인 연구와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약제나 치료방법 등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은 명확한 만큼, 약제와 시각적인 정보의 제시, 그리고 정교하게 계획된 치료 프로세스 등을 통한 새로운 기억의 삭제 또는 조작의 기술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런 기술의 형태가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것처럼 뇌에 침을 꽂아서 연결하는 방식이거나 모자 같은 것을 써서 조작하는 형태는 아마도 아닐 것이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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