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띠론’
카카오톡이 울린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데 카카오톡으로 단체 카톡방 호출이다. 마음이 불안해지고 충전기 콘센트 찾아 이 카페 저 카페를 헤맨다. 전기 뿜는 피카추 한 마리 키우고 싶다. 포켓볼에 넣어서 데리고 다닐 수 있게 하면 아마 보조배터리로 유명해진 중국의 샤오미 못지 않게 흥할 것이다.
누가 스마트폰과 SNS와 메신저를 발명했는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알람을 보면 찾아가서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스마트폰이 주는 피로감이 어마어마하다. 이제 사람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결된다. 네트워크가 지구본을 가로지르는 이상적인 그림을 떠올리지 마시라. 이제 ‘직장상사’도, ‘일 시키는 선배’도, ‘심부름 시키는 오빠’도, 시도 때도 없이 항상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서 읽은 얘긴데, ‘스마트폰에 먼저 손대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있다. 다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안절부절 못하니까, 만나서 얘기할 때만이라도 스마트폰에 손대지 말라고 만든 게임이다. 스마트폰을 먼저 손 대는 루저는 스마트폰 중독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울려대는 알람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불쌍한 처지의 ‘을’일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시간을 빼앗긴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는 일상에서도 누군가의 지배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누가 먼저 받느냐 하는 것은 누가 더 조바심을 내느냐 하는 관계에서의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렇게들 연애하면서 카톡 대화창에서 1이 사라지나 안 사라지나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이른바 ‘썸’이라는 것이다. 뭔가 있을 랑 말랑, 사귈랑 말랑 하는 사이를 ‘썸 탄다’고 한다. 썸이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썸’이라는 용어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경험적으로 보고 들은 얘기로는, 썸은 밥 먹는 횟수에 따라서 정해진다기보다 서로 얼마나 자주 ‘메시지’를 주고받느냐에 따라 불붙는 것 같다. 아침 인사를 하고 밥은 먹었냐고 묻고 밤 인사를 하는 일상적인 대화를 공유하는 게 가까운 사람이 된다는 걸 뜻하는 지표가 될 때가 있어서 그렇다. 보면 이게 아주 귀찮은 일이다. 물론 ‘썸’ 타는 사이이니 서로 메시지에 콩닥콩닥하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옆에서 연애상담이나 해주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렇다는 거다. 썸 탈 때의 메시지 빈도 같은 걸로 고민하는 상황도 그렇고, ‘누가 먼저 읽나’의 눈치싸움도 되게 피곤해 보인다.
카톡을 보고는 싶은데 읽고 나서 읽은 표시가 나면 바로 답장을 해야 하는 ‘초스피드’ 연결 사회이기 때문에 읽기를 미루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남자친구와 싸웠는데, 메시지가 왔는데 보고는 싶지만 답장하긴 싫을 경우. 또 예를 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썸’타는데 시간 두고 메시지를 읽고 싶은 경우. 읽으면 답장해야 되는데 지금 바빠서 귀찮은 경우가 사실 가장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경우엔 내 친구는 머리를 쓴다. 어떻게 하냐고?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읽으면 1이 안 없어져.”
지니어스.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메시지를 읽으면 내가 읽었다는 표시를 상대방이 알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고 친구는 조언했다. 이렇게까지 공들여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시간을 조율하다니, 현대인은 의사소통의 ‘장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메시지를 읽었는데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을 ‘읽씹’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읽었는데 답장 안 하고 씹는다는 문장의 줄임말인데 메시지 보낸 사람의 배신감이 풀풀 묻어나는 격한 문장이다. 사람들은 메시지를 받자마자 당신이 답을 하길 원한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든, 자다가 일어나서 혼자만의 산책을 즐기고 있든, 부모님과 한식 뷔페에서 밥을 먹든 상관없이.

그래서 이런 의사소통 장인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카톡을 읽었다는 표시를 없애지 않는 것은 미묘한 심리 전술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상사의 시도 때도 없는 업무 지시를 피하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고, 이성 친구의 의중만 파악하고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연애 기술이기도 하다(그렇지만 이렇게 공들인다고 해서 연애가 잘 되는 것 같지도 않다). 핑퐁- 탁구공을 주고받는 베테랑 탁구 선수들의 경기를 보는 느낌이다.
다음 카페가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진짜’ 커피를 마시는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기적으로 대화가 끊긴다. ‘스마트폰 타임’이 주기적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옆에 있어도 다 다른 공간에 있다. 서로에게 ‘접속’한다는 표현은 인간관계를 잘 나타내준다고 생각하는데,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있어도 그 공간에서 서로에게 접속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 오감 중에 시각, 촉각, 그리고 청각으로 뇌 전반은 스마트폰에 접속해두고 우리는 옆에서 서로 냄새만 맡는다. 아마 4D 기술이 발전하여 향기 나는 스마트폰까지 나온다면 우리는 굳이 ‘진짜’ 커피를 마시는 카페에서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온라인 카페 주소를 던져주고 ‘여기로 모여’라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다.
스마트 폰을 쓰면서 걸으면 평소보다 시야가 20분의 1로 좁아진다고 한다. 마주보고 오는 사람이 1.5미터 앞까지 다가와야 인식할 수 있는 정도다. 한 걸음 앞에 사람이 있어도 물리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한 공간에 있어도 다른 공간에 접속해있다.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새로운 거다. 새로운 연결망이 생기면서 인간관계 지도도 달라지는데, 얼마 전에 페이스북 친구를 정리하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조별 과제 하면서 누구를 만나도 요즘엔 자연스레 페이스북 친구 추가 요청이 오더라. 만나서 인사하고 통성명하고 나면 서로 페이스북 계정을 교환한다. 온라인판 중국이니 페이스북 대륙에 없는 사람 찾는 게 더 힘든 세상이다. 학생회 공지도 페이스 북으로 오고, 이벤트 초대도, 그룹 만들기도 보통 페이스북으로 많이 한다. 전화번호 알려주기엔 별로 안 가까운 사이일 때 ‘얕은’ 관계망으로 페친(페이스북 친구)를 맺는 거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받다보면 친구가 불어난다. 이미 페이스북은 서로 일상 훔쳐보는 SNS가 아니다. 사업 도구고, 인간관계 확장용 툴이란 느낌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싫어서 페친 정리를 결심했다. 그리고 친구 목록을 쭉 내려 보면서 기준을 정했다. 첫째.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제가 당신 타임라인에서 이러이러한 당신 소식을 들었어요.라고 말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만한 사이인지. 둘째. 1년 동안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앞으로 1년 동안도 대화를 나눌 일이 없을 것 같은지. 이 두 가지를 큰 기준으로 세웠다. 첫째 원칙은 SNS를 하면서 느끼는 '엿보기‘의 희열을 배제하고 싶어서 세웠다. 내가 당신을 보고 있고, 당신도 나를 보고 있겠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하더라도 서로 께름칙하지 않은 사이여야 한다. 쉬워 보이지만 꽤 까다로운 원칙이다. 둘째 원칙을 적용했을 땐 동문, 동창이 우수수 사라졌다. 아마 동창회에서 만나면 다시 페북 친구가 될 지도 모르겠다만 일단은 ’만약을 위해 남겨둘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 번째로 적용한 원칙도 있다. 차별적이고 편파적인 페이지를 좋아요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 친구 목록을 주루룩 내리는데 퍼뜩 떠올랐다. 타임라인에 뜨는 당신의 ’좋아요‘ 행적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의도치 않았어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라.
그렇게 반 이상의 페북 친구를 정리하고 나서 놀랐던 건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이 친구로 남았고, 오히려 지연, 학연으로 얽혀있던 인연들이 많이 떨어져나갔단 것이다. 취향과 일상을 공유하는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온라인의 친구 관계가 재편되었다.
소통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당연히 사람 관계도 달라진다. 내가 사는 세계에선 엄지 아래 일상이 놓이고, 그 ‘엄지의 세계’에서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조금 다르게 생겨난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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