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신분증ㆍ도장만 있으면 혼자서도 신고 가능해 제도 허술
매년 혼인무효소송 300건 접수… 피해자 입증 어려워 이혼 선택도
20대 여성 이모씨는 혼인신고를 위해 남편과 구청을 찾았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구청 직원은 이씨가 함께 온 남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아내로 이미 신고돼 있다는 황당한 얘기를 전했다. 어이없는 상황에 실소하던 이씨는 자신의 ‘법적 남편’이라는 상대의 이름을 듣자마자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오래 전 사귀다 헤어진 남자 친구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통보받은 그가 앙심을 품고 몰래 혼인신고를 했던 것이다. 이씨는 졸지에 남편과 시댁 식구를 속이고 결혼한 사기꾼이 돼버렸고, 이런 그녀에게 시댁은 파혼을 요구했다. 이씨는 뒤늦게 전 남자친구를 상대로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했지만, 그가 “함께 동거하다 결혼하기로 했는데, 이씨가 업무로 바빠 혼자 혼인신고를 한 것”이라고 맞서면서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혼자서도 가능한 혼인신고 탓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혼자’가 되는 황당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 A(20)씨는 남자친구인 B(21)씨가 이별을 통보하고 2014년 3월 군에 입대하자 몰래 혼인신고를 했다. 뒤늦게 사실을 안 B씨는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올해 6월 혼인이 무효임을 인정받기 전까지 1년 넘게 A씨와 법적인 부부여야만 했다. ‘법률혼’ 배우자에게는 사실혼 관계에선 인정되지 않는 재산 상속권이 발생하는 것을 악용한 사례도 빈번하다. 간병인 C씨는 암투병 중인 D씨를 1년 동안 돌보면서 가족의 인적 사항을 모두 파악, D씨가 사망하기 한 달 전 몰래 혼인신고를 했다. 재력가인 D씨의 재산 상속을 노린 범행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허위 혼인 신고된 피해자들이 이를 무효화해 달라며 낸 소송은 서울가정법원에만 매년 300건 가량 된다. 올해만 해도 이달 20일까지 253건의 혼인무효소송이 접수됐다.
몰래 혼인신고가 가능한 것은 당사자인 부부 2명의 합의 의사를 따로 확인하지 않는 등 제도를 허술하게 운영하는 탓이 크다. 우리나라에선 배우자가 될 상대방의 신분증과 도장만 있으면 누구나 혼자서 혼인신고를 할 수 있다. 심지어 도장이 배우자의 것인지 확인시켜 줄 필요도 없다. 현행법은 혼인신고 때 신랑, 신부 쌍방이 각각 최소 한 사람씩 모두 2명의 증인을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증인이 직접 출석하지 않거나 신고서에 자필 서명을 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고자가 증인의 인적 사항만 알면 충분한 것이다.
반면 일단 혼인신고가 되면, 혼인 무효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혼인신고 자체가 법률적으로 당사자에게 혼인의사가 있었음을 추정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피해자들은 혼인무효소송 대신 법률상 이혼을 선택해 법적 혼인관계를 청산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법원 관계자는 “협의 이혼 시에는 쌍방이 반드시 법정에 출석해 당사자 본인 여부와 이혼의사 합치 여부에 관해 판사의 확인을 받는다”며 “혼인신고에도 이와 비슷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외국의 경우 혼인예비절차, 숙려기간 등을 통해 혼인신고가 신중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혼인 당사자 2명과 증인이 모두 출석해 공무원, 판사 등 앞에서 혼인의사를 확인하고 혼인으로 발생하는 의무 등을 설명 듣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김관진기자 spiri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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