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이정재, '베테랑' 유아인, '협녀' 이병헌
실감나는 악인 연기, 영화 완성도 높이고
흥행 일등공신
영화에서 악역은 코스 메뉴로 치면 디저트 정도로 여겨졌다.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악역이 메인 요리가 됐고 맛을 살리는 포인트가 됐다. 여름 극장가의 한국 영화들이 악역 대전을 벌이고 있다.
1,000만 관객을 넘긴 영화 ‘암살’은 변절자 염석진(이정재)의 최후를 보기 위해 이전의 긴 서사시가 전개된 것마냥 엔딩신이 강렬하다. 최동훈 감독은 이 장면을 “‘암살’의 근본”이라고 할 정도로 애착을 보이며 공을 들였다. 안옥윤(전지현)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연기하며 이정재는 차가운 땅바닥과 사투를 벌였다. 최 감독은 이정재가 쓰러진 뒤에도 오래도록 “컷”을 외치지 않고 카메라에 그의 모습을 담았다. 한 겨울 땅바닥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숨조차 쉬지 못한 이정재의 연기는 단순한 악역을 넘어 역사의 상처로 확장된다.
영화 ‘관상’(2013)의 광기 어린 수양대군과 ‘하녀’(2010)에서 대저택의 주인남자 훈의 싸늘한 기운을 연기한 이정재는 ‘암살’까지 짙게 악의 기운을 내뿜으며 염석진을 완성했다. 최 감독은 “이정재는 집중력이 강하고 헌신적인 배우”라며 “이 장면을 찍고 나서 염석진과 안옥윤이 영화의 틀을 완성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740만 관객을 모으며 1,000만 영화로 돌진하고 있는 ‘베테랑’에는 안하무인 재벌 3세 조태오를 연기한 유아인이 있다. 유아인은 ‘베테랑’의 흥행의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개봉 3일만에 100만, 10일째에 500만 관객을 돌파한 데에 그의 강한 연기가 한 몫 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제대로 된 악역 연기가 ‘베테랑’의 흥행질주 포인트”라고 말했다.
그동안 반항기는 있지만 맑은 청춘의 이미지를 보여온 유아인은 첫 악역 연기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호연을 펼쳤다. “나한테 이러고도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라며 마약에 중독돼 제멋대로 행동하는 재벌 3세 연기에 “유아인이 실제로 저런 성격이 아니냐?”는 네티즌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이 스크린을 압도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혈혈단신 거대 권력에 맞서는 형사 서도철(황정민)이지만 영화 관계자들은 “황정민과 유아인의 투 톱 영화”라고 평가한다.
‘협녀, 칼의 기억’의 이병헌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고려말 민란을 함께 주도한 검객들을 배신하고 권력에 욕심을 낸 유백(이병헌)은 영화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는 세력을 향해 무차별하게 칼을 겨누는 냉혈한이지만, 사랑하는 여검객 월소(전도연)를 향한 로맨스 연기는 애절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칼을 꽂아야 하는 절절한 아픔이 관객에게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하지만 그의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 오히려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평도 있다. ‘50억 협박녀’ 사건을 통해 유부남으로서 여성들과 부적절한 말들을 주고받은 사실이 알려진 탓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병헌이 특유의 감성 연기를 빼어나게 한 점 때문에 오히려 대중의 몰입도가 떨어졌을 것”이라며 “배우의 현실과 영화 속 이미지의 괴리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