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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다, 고로 존재한다] 패션은 노년의 용기도 포용해 줘야 한다

입력
2015.08.2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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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5세인 카르멘 델로피체는 세계 최고령 현역 모델이다. 델로피체 페이스북
올해 85세인 카르멘 델로피체는 세계 최고령 현역 모델이다. 델로피체 페이스북

“할머니가 되면, 난 자주색 옷을 입고, 빨간 모자도 쓸 거야,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겠지만. 연금으로 브랜디, 여름장갑, 새틴 샌들을 살 거야. 그리고선 버터 살 돈이 없다고 말하겠어.”

이 시는 올해 85세인 영국 시인 제니 조셉의 ‘경고’의 일부다. 1996년 영국 국영방송국에서 실시한 투표에서 ‘전후 세대의 가장 유명한 시’로 뽑혔다. 전쟁 기간 동안 국가의 배급에 의존해 가난한 젊은 날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 상실한 시간에 대한 보상과 함께 노년을 준비하는 기대감이 묻어난다.

한국의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점유율이 11%다. 한국사회의 고령화 속도는 가파르다. 2018년에는 노인 인구비율 14.3%로 고령사회에 진입하며, 2026년에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평균 수명의 증가와 노인 인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사회적 고민도 커진다. 노인층의 증가는 노년의 라이프스타일과 욕구가 다양해진다는 뜻이며 그만큼 섬세하게 그들의 욕구를 채울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보부아르는 자신의 저서 ‘노년(Coming of Age)’에서 “노년이 될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를 거부한다”며 황혼기의 슬픔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이 이럴수록 노년을 직시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며 우리를 다독인다.

우리의 정체성은 생물학적 조건이 아닌, 사회 속에서 구체화된다. 청년기와 노년기는 연결되어 있으며 노년기에 이르러서야 온 삶의 의미를 추출해낼 수 있다. 노년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다. 청년기 혹은 노년기는 관념의 산물이다. 문제는 관념이 편파적이란 점. 젊고 건강한 육체는 우상화하고 늙은 육체는 부정한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노년에는 스스로 싸우고, 권리를 지키며, 누구든 의지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려 할 때만 존중받을 것이다”라며 당시 노령화 문제로 고민을 앓던 로마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노령층은 과거에 비해 권위와 존경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한다. 문화사가 팻 테인은 ‘노년의 역사’에서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근대는 물론이고 중세와 고대 모두 노인이 누린 존경과 권위는 노령에 의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능력과 지속적인 성취를 통해서만 획득되고 유지되었다”는 것.

옷은 한 인간의 온 생을 이야기하는 도구다. 이때 삶이라는 이야기를 떠받치는 건 인간의 몸이다. 패션은 세월에 따른 신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이를 포용할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출산과 가사노동과 같은 과정을 겪으며 노년기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큰 변화의 감도를 겪는다. 나이가 들며 일명 나잇살이 붙고, 신장은 줄고, 허리는 굽는다. 하지만 패션계는 이런 변화를 실제 의류 생산에 고려하지 않는다. 기성복 구매 후 만족도를 다룬 한 연구에 따르면 43%의 50대 후반 여성들이 실루엣과 소재, 디자인에 불만족을 표시했다. 노인을 위한 맞음새가 없었던 것. 기성복을 체형변화가 없는 젊은 층의 실루엣과 비율에 토대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패션계에는 변화의 조짐이 불었다. 세대에 상관없이 모든 연령대의 여성들이 입을 수 있는 스타일(Ageless style)을 브랜드들이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패션이 사회에 혁신의 힘을 발휘하려면 매체의 협력도 필요하다. 패션잡지들이 노년을 표지모델로 세우고 있다. 올해 85세의 현역모델 카르멘 델로피체는 여전히 런웨이에 선다. 젊은 날의 날카로움은 세월이 흐르며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모든 이에게 노년은 하나의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패션은 반드시 그들의 용기를 안아주어야 한다. 제니 조셉의 시로 마무리 하련다. “이제 난 조금씩 연습해봐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늙어 자주색 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이 기절초풍하지 않도록.”

김홍기·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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