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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왕따를 즐겨

입력
2015.08.2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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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어떤 어른을 만났다. 그 분과 처음 전화로 통화할 때다. 다짜고짜 내게 몇 년 생이냐고 물으신다. 대뜸 이십 살이 더 많으니까 말을 편하게 할 게 하셨다. 그 다음부터는 내리 반말이다.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얼굴도 못 봤다. 그러나 나라고 경장사상의 뿌리가 왜 아니 없으랴. 네 선생님!

대뜸 말을 트고 나시더니 말씀 또한 일사천리다. 그 후로도 그 분은 만나기만 하면 미주알고주알 당신 말씀만 풀어놓는다. 해박하기가 정말이지 그지없다. 경험담도 한 보따리고 아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는데 주저함이 아예 없다. 당신만 쭉 말씀하시고 끝.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 나름 거북하기도 하여 아침을 늦게 먹었습니다요, 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점심은 먹을 것이 아니냐. 어디에선가는 먹을 것이 아닌가. 기어코 물으시고 나의 핑계가 졸렬하니 가자 하시고 당신의 맛 집을 거리낌 없이 찾아간다. 와 보니 냉면집. 막상에 보니 나도 즐겨 찾던 데다. 회냉면을 시키고 장황한 냉면집의 역사를 들으며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점심을 끝냈다.

나오는 길. 또다시 대뜸 고맙다고 하신다. 자네가 아니면 나 혼자 먹을 뻔 했네! 이 어르신의 정체가 슬슬 궁금해진다. 냉면집 전의 말을 놓쳤다, 회의를 끝내고 냉면집을 오기 전 주차장에서 문득 그러신다. 나는 왕따야. 다들 나를 싫어해. 그런데 나는 말이지. 왕따를 즐겨. 눈치를 안 봐. 봐서 뭐해. 하고 싶은 건 해야지. 말도 하고 싶은 건 해야지. 그때다. 이상하게 정이 간다, 이 양반!

막상 살다 보면 아, 이 눈치 저 눈치를 얼마나들 보고 사는가. 지금이 말을 해서 되는 타이밍인가 아닌가. 농담을 건네도 되는가. 술집을 다른 집으로 추천해 볼까. 이거는 저렇게 해보라고 할까.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는데 정작 아무런 말도 못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흘러 사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 분 말마따나 눈치 봐서 뭐하나. 아니면 아니고 하고 싶으면 하는 게 맞지 않나. 질세라 나도 대뜸 그랬다. 어르신,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 그러신다.

나도 말을 잘 참지 못한다. 속으로 다른 꼼수가 없는 한 그저 궁금하면 묻고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서슴지 않고 말한다. 사회생활이니 당연히 교양이나 매너가 있기는 할 거다. 참을 때도 있어야 하고 기다릴 때도 있어야 할 거다. 하지만 그러느라 정작 스트레스가 쌓여가고 사는 게 재미없어 진다면 곰곰이 따져도 봐야 한다. 문제는 말하고 난 다음이다. 괜히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거나 별 매력도 없어 보였겠네 하는 후회가 생기는 것. 어르신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왕따를 즐겨. 그럼 좀 어때?

이번에는 회의장의 일화. 예외 없이 모인 사람들을 연식으로 정리했다. 모두의 나이를 외워오셨다. 각자가 나름의 영역에서 직업의식을 가진 분들인데 남녀불문하고 나이가 공개되었다.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기준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일로 만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어르신은 역시나 아랑곳없다. 끝까지 밀고 나가시더니 하고 싶은 말씀을 혼자 다 하셨다. 중간에 누군가가 의견 개진을 하자, 자신의 관점을 더 큰 목소리로 쭉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회의 끝.

모두가 헤어질 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에 은근히 나에게 한 말씀. 내가 왕따인 이유를 알겠지? 내가 그랬다. 팬도 있으시겠는데요? 흐흐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좋아하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순간 이 어르신이 퍽 귀여웠다. 최소한 나한테는 왕따가 아니었다. 사실 분위기로도 그분은 전혀 왕따가 아니었다. 자칭 겸손을 가장한 것일 터. 더 겪어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눈치 보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분명하게 말하고 거침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나는 더 좋다. 즐긴다면 왕따는 왕따가 더는 아니다.

고선웅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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