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풀 꺾이고 공기의 질감이 슬그머니 변하고 있다. 이럴 땐 많은 생각을 하기보다 그저 변화하는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는 게 좋다. 낯익지만, 어제와 다르고, 앞으로 더 달라질 풍경들. 그것들에 비쳐 짐짓 또렷해져 가는 마음속의 형태와 음영을 종이에 그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오래 전에 장만한 스케치북을 꺼낸다. 천천히 선을 긋자 혼탁하게 흐려져 있던 마음의 풍광들이 일순 선명하고 차분해진다. 사물을 똑바로 보는 게 결국 자신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라는, 새삼스런 물리 원칙을 되새긴다. 계속, 어떤 특별한 형상을 궁구하지는 않은 채, 천천히 선을 긋는다. 마음이 느긋하게 가라앉고, 공허하게 뚫려있던 마음 속 구멍에 산소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문득 무슨 주문처럼 이런 말을 곱씹는다. ‘바라보면 채워진다.’ 선 하나가 그어질 때마다 그 말이 점점 자각되며 하나의 형상이 제 꼴을 찾아간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습을 똑바로 인지하고 거기에 정확하게 반응하는 게 삶의 기본 원리라는 걸 이렇게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은 어쩌면 왜곡된 형상들로 굴절된 허깨비들의 놀이터인지 모른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좌절은 그로 인해 발생한다고 믿는다. 허깨비를 지우고 본래의 형상을 정확히 인지하는 일의 투명함. 다시 선을 긋는다. 이 무심하고 사소한 행위가 변화시킬지도 모를 가을의 또 다른 낯빛을 상상하면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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