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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사전] 주어

입력
2015.08.1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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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이 1,000만 관객을 달성하기 하루 전날 일본 수상 아베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각의 결정’을 거친 다음에 낭독된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법률안, 국회 제출안 등이 각의를 거치므로, 아베 담화는 아베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일본 행정부의 공식적인 의사결정에 속한다.

아베 담화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식민지 지배, 침략, 사과, 반성 등을 언급하면서도 이를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인용과 간접 표현의 틀에 담아서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는 점이다. 아베는 “우리나라는 과거 전쟁에서 한ㆍ일에 대해 반복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 기분을 표명해 왔다”고 한다.

이번에 아베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직접 인정하지도 않았고 사과와 반성을 하지도 않았다. 2013년 국회에서 아베는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발언했는데, 이번 담화 낭독 뒤 기자회견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침략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논의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다시금 밝혔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아베 스스로가 바로 그 역사가의 역할마저 떠맡고 나섰다는 점이다. 아베의 역사적 설명을 요약한다면, 대공황 전까지는 일본도 국제적 반전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려고 했었지만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블록화 때문에 일본의 고립이 심해지고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자 군사력에 의존하게 되었고 일본 국내 정치 시스템이 이를 막지 못해 전쟁의 길로 나가서 패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중국이 바로 과거의 일본처럼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렴치한 역사 수정주의적 인식이고 발언이다. 이런 발언은 대공황 이전에 벌어진,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대만 및 한반도의 식민지 침탈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며, 일본이 전쟁으로 몰리게 된 원인을 전혀 엉뚱한 데에 돌림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질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를 식민지로 먹어 삼킴과 동시에 만주에서의 정치-군사적 지배권을 탈취하기 위해 벌인 러일전쟁에 관해서 “식민지 지배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람들을 고무시켰다”는 표현은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

결국 아베가 담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이렇다. 일본 역대 내각이 이미 반복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 기분을 표명해 왔”으므로, 이제 일본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전후 세대는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고이즈미는 1942년생이고 아베는 1954년생이다.

이러한 아베의 역사 인식은 레토릭한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주어의 결여로 나타난다. 식민지 침탈 및 반성과 사과의 책임 주체를 문법적으로 표시하는 일인칭 단수 주어가 이번 아베 담화에는 단 하나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는 2005년 당시 수상 고이즈미의 담화가 “나는”으로 시작했고, 또 분명히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통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고 밝힌 것과 대조된다. 무라야마나 고이즈미 등의 담화에도 흡족할 수가 없었던 우리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을 무시하는 아베의 역사 인식과 발언에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관용어에 “분하면 강해져라”가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여전히 약하다.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BBK 연루를 입증하는 동영상이 나왔을 때 나경원 의원은 “주어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쉴드’를 쳤다. 하지만 국민들은 전과 14범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러니 아베의 주어 없음과 무책임함을 탓할 수 없다.

또한 세월호 사건 등 많은 정치적 실패와 과오에 대해서 박근혜 대통령은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자국의 정치 지도자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못하는 국민들이 외국 정치인, 그것도 역사가 노릇까지도 하고 있는, 소위 전후 세대 정치인에 대해서 진정한 사과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아베가 이번 담화에서 쓴 주어 없는 화법, 즉 유체이탈 화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화법은 한국의 지도자도 늘 즐겨 쓰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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