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27개 주요 국가 외교장관이 총집결했던 지난 5, 6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 현장에서 만난 북한 외교관들의 모습은 멀끔했다. 스위스, 제네바대사 등을 10년 이상 지낸 리수용 외무상이나 미국 뉴욕 유엔대표부에서 잔뼈가 굵은 리동일 전 차석대사 등의 행동은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6일 미디어센터에서 가진 긴급 기자회견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외무상 대변인을 자처한 리동일은 공지했던 시간보다 한 시간 반 늦게 회견장에 나타나 한국을 비롯한 각 국 기자들에게 일방적 주장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미국이 무력 증강을 통해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구실로만 조선(북한)을 이용하려 한다면 제2의 조선전쟁(6ㆍ25)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협이나 “전세계가 김정은 위원장의 역동적인 리더십을 목도하고 있다” 같은 체제 선전이 발언의 대부분이었다.
부끄러웠다. 유엔 총회를 제외하곤 북한 외교관들이 얼굴을 내미는 거의 유일한 국제회의 현장에서 전쟁 운운하고 자신들의 전체주의 체제 당위성만 내세우는 일방적 자세를 수긍하기 힘들었다. ARF 현장에서 한 민족인 한국, 혈맹관계라는 중국 외교장관은 외면하고 자신들이 가장 거세게 비난해온 나라이면서도 1년 전 경제적 대북제재 해제를 당근으로 교섭을 시작한 일본 외교수장과는 마주앉는 북한의 처신이 얄밉기도 했다. 아마 김정은 제1위원장 등 북한 최고위층 지시에 따랐겠지만,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행태였다.
북한 지도자의 이해 못할 처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ARF와 같은 시기 방북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대접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2월 “다음해 좋은 계절에 여사께서 꼭 평양을 방문하여 휴식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시기를 기대한다”며 친서를 보냈던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이 여사의 평양, 묘향산 체류 3박 4일 동안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북한의 대남사업 책임자 대신 부위원장만 내보낸 것도 아쉬웠다. ‘일개 남한 인사의 개인적 방북’으로 가볍게 취급했는지 몰라도 남북화해의 염원을 모아 노구를 이끌고 찾아온 사람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고 본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최근 북한의 비방 강도와 도발 수준이다. 최근 조선중앙TV가 보도한 북한 군 사격장 표지판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표적으로 등장했다. 상대방 국가원수를 적개심의 대상으로 삼아 총탄을 퍼붓겠다는 저주는 남쪽의 극우 전쟁맹신론자와 차이가 없다. 목함지뢰 폭발 사건도 두 젊은 군인의 미래를 앗아간 도발이다. 게다가 북한의 공식 연구기관과 관변 단체에서 내놓은 ‘희세의 악녀’, ‘기형적인 독사’, ‘인간 아닌 산송장’ 등 입에 담기 힘든 비방은 남쪽의 악성 인터넷 댓글보다 형편 없었다.
이 모든 허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다만 북한은 분단 70년의 아픔이니 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북한의 천편일률적인 선전선동, 비방, 도발이 국내외 상식을 갖춘 평화 화해 세력을 위축시키는 것은 자명하다. 아무리 박근혜정권과 대화하지 않기로 했다 하더라도 북한의 비상식적 행태에 대한 나쁜 기억만 남겨두면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남북관계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권헌익, 정병호 교수는 노작 ‘극장국가 북한’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분명한 것은 북한에 미래가 있으려면 극장국가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원성을 중시하는 현대적 정신에서도 한 사회의 특수한 정통성은 오직 다른 사회들이 인정하고 승인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는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 2018년 분단 73년을 또다시 한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북의 지도자부터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정상원 정치부기자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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