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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혁명론 몸소 실천… 일제 악명 높은 고등경찰도 머리 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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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혁명론 몸소 실천… 일제 악명 높은 고등경찰도 머리 숙여

입력
2015.08.1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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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 인격의 힘 길러야"

시기와 질투, 편가르기 악습 극복… 이 땅의 온전한 독립 가능 주장

日 고등경찰 미와와의 인연, 항일애국지사 취조 염라대왕 별명

도산에 감화돼 교도소 면회 다녀… 타계 직전 미와 아내는 수혈 자청

안창호는 이름난 독립운동가요 사상가였으나, 독립무장투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도 아니고, 외교노선의 한 축을 담당한 것도 아니었다. 충성을 다짐하는 추종자들을 끌어 모아 사조직을 만들고 그 위에 군림하는 계보정치도 완강히 부정했다. 안창호의 길은 유난히 좁고 험했다.

그의 성품은 맑고 깊고 단아했다. 사물을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깊이 성찰하는 것이 그의 특장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깊이 헤아린 결과, 그는 “독립할 자격”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선언했다. 개개인이 “인격의 힘”을 길러야만 독립도 온전한 독립이 된다는 말이었다.

인격혁명 일어나야 완전한 독립 가능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민족지도자들은 대체로 그와 다른 입장이었다. 특히 이승만처럼 정치적 수완이 좋은 사람들은 안창호의 도덕론을 공허한 빈말로 여겼다. 21세기 한국의 시민들 가운데서도 안창호의 인격주의에 공감하지 못할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안창호는 자신의 견해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1935년 그는 서울 성북동의 한 모임에서 인격혁명론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이거 또 춘원(이광수) 식의 민족개조론이구나, 하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이 인격혁명이지요.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서로 믿고 일하는 게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편 가르기부터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조선이 망할 때 하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단 말씀이오. 이런 인격밖에 못 가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겠어요?” “혹자는 어느 세월에 인격 혁명으로 사회를 바꾸겠느냐고 반론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인격혁명을 이룬 이가 한 해에 열 명, 스무 명이라도 늘어간다면 사회가 좋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보시오. 같은 민주주의라도 (1930년대)멕시코의 것과 미합중국의 것이 완전히 다르지 않소? 본바탕이 잘못되면 아무리 씨가 좋아도 결과가 그릇된다는 말씀이오.”

지도층의 기만과 도덕적 타락이 한 시대의 악습으로 굳어진 오늘날, 진부하리만치 교과서적인 안창호의 주장이 도리어 이 시대를 다스리는 죽비가 되어 빛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안창호는 자신의 60 평생을 통해 인격혁명이 가능한 것이요, 실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도산의 인품에 고개 숙인 고등경찰 미와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경성제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병상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아름다운 한 그루 화분이었다.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부부가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미와는 악명 높은 고등경찰이었다. 이상재를 비롯하여 나석주, 한용운, 박헌영 등 많은 항일애국지사를 악랄하게 취조하여, “염라대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자였다.

안창호와 미와의 인연은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봉길 의사가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직후, 그 사건의 여파로 안창호가 체포되었다. 상해에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미와 경부의 취조를 받았다. 미와는 날마다 악랄한 심문을 거듭하였으나 그럴수록 안창호의 고결한 인품이 더욱 빛났다. 안창호는 대한독립에 관한 자신의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정직하다 못해 성실했다. 우격다짐에 침묵으로 항의할지언정 거짓된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모질게 추궁해도 한 번 입을 다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몰린 피의자 안창호가 도리어 단정하고 당당하였다. 소박하고 겸손한 조선의 위대한 인격이라는 말로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염라대왕’ 미와는 그 인격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안창호는 마지막까지도 그랬다. 1936년 여름, 일제는 중일전쟁을 앞두고 공안몰이를 시작하였다.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지도자를 체포하였다. 종로경찰서에서 처참한 고문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안창호가 이를 보다 못해 형사를 불렀다. “우리 젊은 동지들에게 그대들이 많은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심히 분노합니다. 내게는 아직 고문을 하지 아니했는데, 대답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이미 다 하였소. 만일 내게 고문을 한다면 더 이상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시오.”

이후 석 달 동안 험한 취조가 계속되는 바람에 안창호는 완전히 건강을 잃었다. 그래도 그의 시퍼런 기상은 시들지 않았다. 고초를 함께 겪은 장리욱은 1936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의 살풍경을 독백처럼 말하였다. “차디찬 소독물을 펌프로 막 뿜어 대는 통에 유치장에서 파리할 대로 파리해진, 피골상접한 동지들의 나체에는 소름이 끼쳐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도산(안창호) 선생은 그야말로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단정한 태도로 그 차디찬 소독물 대포 시련을 받았다. 도리어 시원한 기분을 느끼시는 듯 태연자약하셨다. 도산 선생도 역시 다른 동지와 같이 쇠약한 몸에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춥고 쓰라렸겠으나, (중략)그런 시련을 단정한 태도로 극복하셨다. 그때 선생의 인상이 너무도 엄숙하고 비장해서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쓰러지는 것이 너무 당연할 때조차 안창호는 태산같이 고요하고 엄숙하였다. 미와는 안창호의 이러한 풍모를 일찌감치 알았다. 그랬기에 그는 1932년 안창호의 조서를 작성할 때 최대한 호의적으로 꾸몄다. “만약 내가 진술한 그대로 조서를 만들었더라면, 나는 훨씬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안창호는 미와의 행적을 후세에 전했다. 안창호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자 미와는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갔다. 보다 못한 교도소장 미야자키(宮崎)가 미와 경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미와 부인 눈물 흘리며 헌혈을 자청

그 안창호가 1938년 3월 병석에 누워 사경을 헤맸다. 소식을 들은 미와는 자기 아내와 함께 병상의 도산을 찾아갔다. 별세하기 이틀 전이었다. 안창호는 함경도경찰국 미와 경시의 문병 소식을 그 다음 날 병원으로 몰래 찾아온 옛 동지 선우혁에게 일렀다. “아무리 우리가 서로 원수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말이오. 미와의 아내는 딱한 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더군요. 뿐더러 그는 혈액형이 나와 같으므로 수혈을 하겠다며 의사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겠소. 그런 것을 내가 가까스로 만류시켰소.”

안창호로 말하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달려온 한국인이오, 미와는 일제의 하수인이었다. 미와가 줄곧 호의를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원수” 사이였다. 그렇건마는 병세가 위중한 자신을 위해 눈물을 쏟은 미와 부인에게서 안창호는 고마움을 느꼈다. 핏기를 잃은 안창호에게 부인은 자신의 피까지 나눠주려 했다. 아마도 미와가 자기 아내에게 안창호의 고상한 인품을 줄곧 칭찬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의 친절을 헤아릴수록 안창호의 심경은 더욱 불편해졌을 것이다. 식민지배라는 비극만 아니라면 그들은 얼마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처지 때문에 우리는 피치 못할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안창호는 이런 결론을 내리며 헌혈제의를 사양하였다고 본다. 개인의 친분보다 민족의 이해관계가 더욱 절실한 문제라고 그는 확신하였을 것이다. 안창호의 시대에는 민족주의로 가장한 제국주의가 세상을 휩쓸었다. 그 물살이 대한해협 양쪽의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훗날 미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 직후 김두한이 그를 처단하였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일본의 아베 정권은 내외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략주의 노선으로 회귀할 태세다. 그들의 꽉 막힌 귀를 잡고 나는 이렇게 안창호와 미와 일가의 사연을 말한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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