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를 거수기로 만드는 재벌체제
경영 잘못은 기업ㆍ국가에 위기 초래
오너 권한 분산ㆍ제어하는 장치 필요
재벌의 후계 갈등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해 소유와 경영이 제대로 분리되지 못한 데다, 기업이 정부의 특혜를 받으면서 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순환출자 등을 통해 문어발 확장을 하다 보니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삼성을 비롯해 현대, SK, 롯데그룹 등 대기업은 창업자가 일선에서 후퇴하고 후계구도를 정해야 할 즈음, 거의 예외 없이 갈등을 겪고 이 과정에서 오너(총수) 리스크가 돌출하는 패턴을 보여왔다.
재벌(財閥)은 족벌(族閥)이나 군벌(軍閥)처럼 어감부터 좋지 않다. 벌(閥)은 출신ㆍ이해ㆍ인연 따위를 함께 하면서 서로 뭉치는 세력이나 집단이다. 특히 재벌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진출해 중소상인들을 위협하고 경영권 편법 승계,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배임 및 횡령 등의 잘못을 저질러 온 탓에 부정적인 이미지는 한층 확대됐다. 이번 8ㆍ15특사 대상에서도 재벌 총수는 최태원 SK 회장으로 한정된 것도 이 같은 국민감정에서 비롯됐다.
롯데그룹의 ‘형제의 난’ 과정에서 불거진 것처럼, 재벌의 대표적인 폐해가 ‘황제경영’이다. 재벌 총수들이 2~3%에 불과한 지분으로 수십 개의 계열사를 주무르는 것이다. 롯데가 정도 심한 편이나 다른 그룹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황제경영 체제에서 이사회는 총수일가나 회사 경영진의 거수기 역할에 그친다. 사내외 이사 모두 반대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롯데그룹 8개 상장사에서 2012~2014년 3년간 359차례 이사회가 열렸으나 부결시킨 안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황제경영은 이처럼 독단적이고 신성불가침이다. 대통령은 임기가 5년에 불과하지만, 재벌 오너는 임기도 없고 대를 이어간다. 북한체제에서 숙청이 난무하듯, 오너는 임직원을 해고하면 그만이니 반대의견이 나올 여지는 거의 없다. 최근 롯데 사태 후 외국 언론의 눈에 비친 한국 재벌의 모습은 온통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뿐이다. “족벌 기업의 승계 분쟁이 한국에서 특히 빈번하고 해로운 형태로 나타났다”거나 “한국인들이 재벌가의 경영권 다툼에 익숙하며 이것만큼 관심을 사로잡는 것도 없다”, 혹은 “한국 재벌의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와 탈세 등이 주주 이익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는 등이다.
1970~1980년대처럼 고속성장 시절 재벌체제가 국가경제를 고속으로 견인한 건 사실이다. 효율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던 다급한 시절로 이해할만한 구석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지금 같은 저성장 국면에서는 다르다. 시기적으로도 오너 리스크가 극대화할 수밖에 없는 때다. 빛의 속도로 기업환경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재벌오너가 경영판단에 실패할 경우 기업은 물론, 우리 사회가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오너에게 권한이 집중된 상황에서 그의 실수나 범법행위가 곧바로 국가 경제에 심각한 해악으로 이어진다. 대우그룹이 그 한 사례다. 따라서 이 오너 리스크를 해소해야만 우리사회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 시대적 과제인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지배구조개선이나 재벌개혁 문제가 본격 대두했으나,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달리 나아진 것이 없다. 순환출자 고리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황제경영 방식은 여전히 건재하다. 정치권에서 노동개혁과 재벌개혁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무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 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크다. 그렇다고 재벌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재벌 스스로 머리를 깎지 못하는 구조적인 부분은 정부와 시민사회 등이 나서서 견제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급한 대로 유명무실한 사외이사제도를 애초 취지대로 정착시켜 내부감시를 철저히 하도록 해 오너들의 독단경영을 막아야 한다. 나아가 오너의 권한을 분산하고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고 제대로 가동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이 몇몇 오너에 휘둘리는 상황을 더는 놔둬선 안 된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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