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출신 망명자로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 문장을 썼던 에세이스트 에밀 시오랑은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해야만 했던 것을 평생 저주했다. 여자의 처지가 이와 같았다. 세계는 남자의 말로 구축돼 있으므로 여자에게는 언어가 없었고,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여자는 남자의 말이라는 외국어를 사용해야 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로 된 세계에서 망명자이며 언어 난민이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343쪽)
일본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가 2013년 쓴 책 ‘여자들의 사상’은 격투의 흔적이 가득한 여자의 말로 비로소 여자의 사상을 이야기하게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한 개인의 내밀한 독서록이자 20세기를 뒤흔든 페미니즘을 쉽고 명쾌하게 정리한 통사인 동시에 우에노 지즈코라는 탁월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의 사상적 궤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저자의 바로 앞 세대 일본 페미니스트 사상가 다섯 명의, 2부는 오늘날 페미니즘 사상에 인식론적 대변환을 가져온 외국 사상가 여섯 명의 대표적 저작을 한 권씩 다룬다. 2부에는 이브 세즈윅, 조앤 W 스콧,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와 함께 남성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미셸 푸코를 포함시켰다. 페미니즘을 ‘여자/남자’를 만들어내는 장치를 폭로하는 사상이라고 할 때, 사이드와 푸코야말로 그 사상의 주춧돌을 놓은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 다루는 일본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인물들이지만, 두 나라의 역사ㆍ사회적 유사성으로 인해 그 행보가 절절하게 읽힌다. 임신과 출산의 경험을 통해 ‘복수의 나’를 경험하고 근대인 모두에게 자아의 복수성과 출산의 사상이 필요함을 역설한 모리사키 가즈에의 사상이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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