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풍뎅이들의 아침

입력
2015.08.13 23:40
0 0

폭염이 계속 되고 있다. 아직 고개를 숙이지 않은 해바라기는 강렬하게 햇빛과 맞선다. 바람도 없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위에 고추잠자리가 유영한다. 그렇잖아도 한적한 산골마을인데 산수화에 점 찍힌 인물처럼 드문드문 보이던 농부들도 모두 사라지고 밭작물과 과수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식물처럼 고요한 정적 속에 있다. 한 계절을 건너가는 자연의 섭리에 어찌 절정의 순간이 없으랴 생각하며 요리조리 그늘에 신세지며 땡볕에 쫓겨 다닌다.

농사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순진한 젊은 농부에 대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의욕에 찬 부부는 직장 출근하듯 아침만 먹으면 밭으로 나갔다. 한낮의 땡볕아래서 머릿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밭을 매는데도 풀은 점점 무성해졌다. 그런데 이웃 밭은 도무지 일하는 사람 모습을 보지도 못했는데 항상 말끔하고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랐단다.

어릴 때 부스스 눈 비비고 방문을 열면 아버지는 이슬 함초롬히 묻은 산딸기덩굴을 마당에 툭 던져놓곤 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새벽에 몰래 딸기를 따러 다니나 궁금했다. 나도 이제는 어슴한 새벽에 일어나 이슬 젖은 밭으로 나가셨던 아버지를 이해한다. 농부에겐 햇빛에 맞춘 일과표가 있다는 것을 지금쯤은 젊은 농부도 알았을 것이다.

오늘은 동네 진입로 양편에 무성한 풀을 깎았다. 아직 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주로 밤에 책이라도 몇 줄 읽고 궁시렁거리는 습관이 든 나는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무슨 큰 부역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아내는 눈 비비고 일어나 밥상을 차리고 나는 꾸역꾸역 먹었다. 오며 가며 다정하게 인사는 나누어도 아직은 흉허물 다 나누지 못한 이웃 간인지라 예초기 메고 부리나케 나가니 다행히 먼저 온 이가 없었다. 주로 과수원을 하기 때문에 한 마을에 살아도 서로 얼굴보기가 쉽지 않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고 길 양편으로 나뉘어 풀을 깎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유쾌한 풍뎅이들이 웅웅거리며 풀꽃 위를 행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새벽노동의 상쾌함 못지 않은 진한 아쉬움이 뒤섞였다. 모든 잡초도 제 생의 한 번은 머리에 꽃을 다는 것인데 보행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길옆에 자라난 이것을 꽃길이라 생각하면 안 되나? 근 십리길 양편으로 호위병처럼 뒤섞여 물봉선도 피우고 달맞이꽃도 피우고 달개비, 억새, 익모초 어우러진 야생의 꽃길을 나는 낭만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 밖으로 일 미터 가량을 밀어젖히며 나갔다. 길옆에 늘어진 것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조금 뒤 편에 피어있는 꽃들은 살짝 피하고 풀을 벴다. 당연히 울퉁불퉁 구불구불 나갔다. 누군가 뒤를 툭 쳐 돌아보니 올 봄에 이장 직을 내려놓은 구 이장이었다. 거의 막내벌인 마을에 뜻 맞추기 좋은 또래인데 도리어 그는 내 서툰 풀베기를 손 젓더니 시범을 보이며 거침없이 나갔다. 그가 지나간 길은 바리캉으로 민 것처럼 깨끗했다.

어느새 둥실 떠오른 아침 해가 이마에, 목덜미에, 어서 땀 쏟아내라 윽박지를 무렵 풀베기 작업이 끝났다. 풍뎅이처럼 왱왱거리던 기계소리가 일제히 꺼지고 그늘에 둘러앉아 서로 수고했다며 눈인사를 나눌 때, 초입에 혼자 사시는 예천댁 아주머니가 부추전에 담금주를 한 병 가지고 나왔다. 나는 꽃은 잊어버리고, 거 참! 해 뜨자마자 둘러앉아 아침술이라니…. 무언가 통쾌하고 흐뭇하고 얽매이지 않는 여유를 느꼈다. 그래 이게 시골생활이야. 자기 생각 조금 줄이고 남 생각 조금 더 받아들이고 그렇게 어울려 살면 이웃이 사촌 되고 이 넓은 세상, 봉화에서도 만리산 꼭대기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식구가 되기도 하는 거야.

자리를 털고 각자 예초기를 둘러메는데 구 이장 친구가 말했다. “이라지 말고 내년엔 아예 제초제를 확 뿌리시더!” 나는 웃으며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럼 아침술은 언제 먹어?”

정용주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