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공립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집단 성추행 사건을 보며 잊고 있던 악몽이 떠올랐다. 처음 친구에게 한 교사의 추행을 들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발달이 빠른 여자아이들은 막 2차 성징이 나타나 제법 가슴이 봉긋하게 표시가 났는데, 그 친구는 유독 발달이 빨랐다. 저학년이라 수업도 일찍 끝나는 터라 삼삼오오 친구네 집에 몰려다니며 인형놀이를 하거나 시답지 않은 비밀을 나누곤 했는데, 그 애가 털어놓은 비밀은 감당키 어려웠다. 그 교사가 운동장 한 켠으로 불러 가슴을 쓸어 내리는 등 몇 차례 성추행을 했다는 고백이었다.
눈이 빨개지도록 우는 친구를 달래며 열살 남짓한 여자아이들이 내놓은 대응책은 되도록 그 교사의 눈에 띄지 않게 복도에서 피해 다니고, 재수없게 마주치면 뒤통수를 째려보자는 게 고작이었다. 5, 6학년 언니들이 자료실에 불려가 더한 일을 당하고는 울며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후 3년 이상 그의 만행은 발각되지 않고 지속됐다. 피해 학생 누구도 기껏 철없는 제 친구들에게나 속을 털어놓았을 뿐, 부모나 선생님 등 다른 어른에게는 함구했기 때문이다.
A고 사건을 보며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너나없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으로 간단히 게시물을 올릴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2년 가까이 은폐됐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피해자 중에는 성인인 여교사도 있었다. 어떻게 교사 5명과 교장 등 6명의 가해자가 여학생 20명과 여교사 8명을 성추행하고, 수업 중 13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일삼을 수 있었는지 의아했지만 여교사의 인터뷰를 보고 수긍이 갔다. 가해자는 처벌은커녕 신설학교의 개국공신으로 떠받들어졌고, 교장마저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학습된 무력감이 피해자들을 짓누른 것이다.
A고 사건으로 우리 사회에 경종이 울렸지만, 서울시교육청은 감사과정에서 진술서 일부 누락뿐 아니라 감사팀 직원의 가해 교사 두둔과 음주, 성추행 의혹까지 내부의 한심한 모양새만 노출했다.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이목이 집중된 사건 처리마저도 지지부진한 가운데 과연 누가 학교 성범죄에 용기를 내서 신고하려 들까 답답함을 지울 수 없다.
교육당국은 성범죄 교원 적발 시 즉각 퇴출시키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도입 등 강력한 대책을 시사하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성폭력을 저지른 교원을 수업에서 배제하고 즉시 직위해제 조치해 피해자와 격리하도록 한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지난 6년간 성범죄 혐의로 중징계 받은 전국 초ㆍ중ㆍ고 교사는 모두 299명에 달하며, 이중 139명(46.5%)은 정직 이하 징계로 여전히 교단에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내 악몽 속 그 교사는 수십명의 초등학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지만, 아무일 없다는 듯 얼마 후 지방 학교로 전근을 갔다. 제대로 된 처벌이 부재했기에 상처를 얼렁뚱땅 봉합 당한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이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와 어른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채 성장해야 했다. 고등학생 때 만원버스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성추행보다 직접적 피해가 없었던 그 사건이 더 분하게 기억되는 건 바로잡을 시간이 꽤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컸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그 동안 무겁지 않은 성추행 정도는 그저 여자아이가 자라는 동안 있을법한 통과의례로 치부해온 측면이 크다. 부당하게도 여자아이들은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방어적 입장만 강요당해 왔다. 피해자의 신고 부담을 줄이고 조속하게 처리하는 식으로 더 적극적인 성폭력 방지책이 있는데도 말이다. 엄중하고 신속한 처벌이야말로 잠재적 가해자에게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고, 미래의 피해자가 좀 더 빨리 용기를 내 신고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성폭력의 특성 상 피해를 입증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공론화 이후 개인이 떠안게 되는 부담이 너무 크다. 교육당국은 전체 학교를 대상으로 성폭력 전수조사나 적극적인 신고 유인책 등 좀 더 실질적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
채지은 기획취재부 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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