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인문사회 교양 수업이나 시민 강좌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노동 소외’에 관한 내용이다.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이래로 작은 도서관 하나는 거뜬히 채울 만큼 많은 논의가 있는 주제지만,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대량 생산 체제 하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생산품에서 소외된다는 뜻이다. 재료를 고르고 도구를 손수 사용하고 직접 최종 생산품을 만들 때와는 사정이 달라져, 노동자가 일개 부품으로 전락했다는 진단이다.
과연 과거의 노동은 소외되지 않았는지, 정말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 각자의 영역에서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는 건 분명하다.
무형의 지식을 가공하고 유형의 생산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출판이다. 때문에 출판은 지식산업이면서 ‘제조업’에 속한다. 지식콘텐츠를 기획하고 저자를 발굴하고 원고를 청탁하고 교정ㆍ교열하고 디자인을 의뢰하고 종이를 구매해 인쇄와 제본을 발주하고 서점과 거래하고 독자와 교류하는 일이 출판노동자의 일이다. 이 과정이 어떻게 하면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 될 수 있을까. 1인출판사처럼 혼자서 이 모두를 다 관장하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오늘의 출판노동자가 혼자서 글 쓰고 종이를 자르고 손수 모든 글과 그림을 그린 뒤 제본까지 한 윌리엄 모리스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윌리엄 모리스의 캠스콧 에디션은 출판의 모델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대량 생산 및 유포되는 매스미디어로서의 책을 만들며 소외되지 않는 노동자가 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출판인이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 방법은 자신이 펴내는 책의 내용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 출판노동자 11인의 이야기를 담은 ‘출판, 노동, 목소리’라는 책이 나왔다. 부끄럽게도 가장 기본적인 노동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것이 출판계의 현실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회학자, 철학자, 경제학자의 책을 펴내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소외 극복을 외친 마르크스의 책을 펴내는 노동자가 가장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표절논란, 대형출판사의 경영권을 둘러싼 낯뜨거운 이전투구 등 그간 우리는 자신의 책을 배반하는 일을 너무 많이 저질러왔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 요리, 뜨개질 같은 실용서적은 할인율에 제한이 없었다. 말하자면 출간과 동시에 50% 할인을 할 수 있었다. 맹점은 실용서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내용과 무관하게 실용서적에 할당된 ISBN 도서번호 ‘1’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도서정가제 시행 직전 ‘1’을 단 인문서들이 등장했다. 선명하고 참신한 진보의 표상으로 꼽히는 한 교수의 책도 이 대열에 합류해 50% 할인 공세를 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편법과 사재기 같은 불법 마케팅에 비하면, 학술서에 꼭 필요한 ‘찾아보기’를 만들지 않는 것은 애교에 가깝다. 원서에는 버젓이 있는 수백 개의 각주를 국내번역서에서는 없애버리는 일, 저작권을 무시하고 해적판을 펴내는 일 같은 만행도 비일비재하다. 또 온ㆍ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서점에 책이 잘 진열될 가능성은 내용보다는 광고와 납품 단가에 좌우된다.
출판인들이 글이 담고 있는 가치를 배신하는 일을 버젓이 하는데 책이 전하는 가치에 귀 기울일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판의 위기 역시 책의 위기가 아니라 출판인의 위기일 공산이 크다. 한국 출판인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은 전자책의 확대와 아마존의 국내 진출 같은 외부적 요인일까, 우리의 배신일까? 후자일 것이다. 출판인이 책을 배신할 때, 책은 현실을 떠난 고담준론이 될 뿐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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