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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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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

입력
2015.08.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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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환수 리스트 35%가 일왕으로부터 작위 받아

친일 대가로 받은 연금 기반,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재산 늘려

실제 국고 환원 재산은 극히 일부… 친일의 부와 권력 세습 이어져

대한제국 황족 이재완(1855~1922)은 일제의 해결사였다. 그는 1903년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그 공로로 대한철도회사 사장에 낙점됐다. 2년 후엔 조흥은행 전신인 한성은행 행장이 돼 일본이 금융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발행한 제일은행권 통용에 앞장섰다.

친일의 대가는 두둑했다. 이재완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일왕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포상금 33만6,000원(현재기준 약 33억원)을 받았다. 그는 이 돈을 다시 한성은행에 투자해 막대한 이자 수익을 얻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이재완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에 대한 공로가 경탄할 만하다. 이씨가 금전에 무한한 욕심이 있는 것을 간파해 이처럼 대성공을 이루게 됐다.”

부는 대물림됐다. 이재완이 숨진 뒤 후작 작위를 이어 받은 아들 이달용은 광산 개발, 생명보험회사 운영 등 아버지 못지 않은 수완을 발휘해 재산을 불렸다. 가족들은 서울 가회동 대저택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후손도 서울 명문대 교수를 지내는 등 사회 주류로 살았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위원은 12일 “선친의 재산이 있었기에 친일파 후손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재산

부와 권력의 공생. 친일파가 오늘날까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한국일보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2010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재산환수 리스트에 오른 168명 중 58명(35%)이 일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 귀족’으로 나타났다. 일본에 협조한 대가로 훈장을 받은 이들은 무려 163명(97%)이나 됐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실장은 “일제가 친일파에게 지급한 부와 권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친일의 역사는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된 당일 일본 정부는 친일파 76명에게 선물을 안겼다. 작위 부여와 함께 토지와 1억~4억원 규모의 은사공채증권(연금)을 지급한 것. 친일파는 이를 기반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불렸다. ‘조선 최고의 갑부’로 불리던 민영휘는 민중의 논밭과 화폐를 강제로 빼앗았다. 작위를 받은 후에는 정부로부터 회사 설립과 합병에 대한 인ㆍ허가를 손쉽게 얻어내 부를 불렸다.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민영휘의 후손들은 체계적인 자산 관리를 위해 가족 회사를 설립했는데 10년이 안 돼 서너 배 성장했다”며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는 경제적 특혜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친일파 168명이 후손들에게 남긴 재산은 총 1,113만9,645㎡, 2,106억원 규모다. 후작 이해승의 후손이 보유한 땅은 197만㎡(320억원), 남작 이근호 후손의 땅은 6만3,652㎡(154억원)에 이른다. 자작 고영희의 후손은 3대가 친일재산조사위원회 리스트에 오른 사실도 확인됐다. 아들(20만㎡ㆍ42억원), 손자(23만㎡ㆍ39억원), 증손자(1만5,000㎡ㆍ2억6,000만원)가 모두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참여정부 때 친일 대가로 받은 재산을 국고로 환원했지만 추적이 쉬운 토지에 국한됐고 제3자에게 팔아 치운 토지나 현금화한 재산, 귀중품 등은 제외됐다”며 “친일파로부터 회수한 재산은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후손도 부를 기반으로 권력 유지

1910년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제에 넘기고, 한일병합조약에 협조해 자작 작위를 받은 민병석의 차남은 민복기 전 대법원장이다. 민 전 대법원장의 자제들도 기업인, 검사 출신 변호사로 활동했다. 민병석은 후손들에게 2만3,340㎡(3억8,000만원)의 토지를 남겼다. 유신정권은 1978년 정년 퇴임하는 민 전 대법원장에게 최고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아버지는 일제, 아들은 독재정권에서 훈장을 받은 셈이다.

1907년 순종을 협박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자작 이병무의 증손자는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대기업 부회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자작 민영휘의 손자는 한국은행 총재, 후작 이해승의 손자는 서울그랜드힐튼호텔 회장, 을사오적인 자작 이근택의 손자는 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현병철 전 국가인권위원장의 증조부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관 중추원의 참의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현준호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현준호의 친일행위를 인정, 소유 땅 3만2,000㎡(10억원)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신명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는 “1~3공화국 시기 정ㆍ부통령을 포함해 414개 요직에 앉은 사람 중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가 111명이나 된다”며 “광복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부와 권력이 세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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