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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타박타박... 어느새 여름 고개도 훌쩍 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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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타박타박... 어느새 여름 고개도 훌쩍 넘었네

입력
2015.08.1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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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절정다웠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맺히는, 그야말로 염천(炎天)이었다. 더위가 무섭지만 걷고 싶었다. 무작정 걸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풀고 싶었다. 문득 경북 문경이 떠올랐다. ‘길의 고장’ 문경의 아름다운 길들로 마음이 향했다.

아침 저녁으론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 끝자락엔 가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문경새재의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뜨겁던 여름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아침 저녁으론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 끝자락엔 가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문경새재의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뜨겁던 여름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선유구곡의 숨겨진 각자를 찾아서

이른 아침부터 해가 뜨거웠다. 그래서 처음 찾은 길도 맑은 물소리 들리는 계곡길이다. 문경시가 근래에 조성했다는 선유동천나들길에서 첫 걸음을 뗐다.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입구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입구

백두대간의 대야산(931m)을 사이에 두고 같은 이름을 지닌 2개의 계곡이 있다.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에 있는 선유동계곡이다. 2곳 다 신선이 노닐 만 하단 이름값을 하는 물줄기다.

구곡은 계곡의 절경 중 하이라이트 9개를 꼽아 이름 지은 것. 중국 남송 때 주희가 무이산 아홉 구비의 경치를 이름해 ‘무이구곡’이라 한 것을, 주자학을 숭상했던 조선의 선비들이 본떠 지은 것들이다.

선유동천나들길의 시작점은 문경 가은읍의 운강 이강년 기념관이다. 구한말 의병을 일으켜 문경은 물론 원주 가평 인제 봉화 제천 등지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의인이다.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운강 생가 앞 강아지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운강 생가 앞 강아지

길은 금세 계곡을 만난다. 올 여름 가뭄이 심해서인지 물이 기대만큼 풍성하진 않았다. 이 시작 부분의 계곡은 ‘칠우칠곡’이다. 구한말 가은에 살던 7인의 은둔거사들이 붙인 이름이란다. 이들의 호(號)에는 모두 어리석을 우(愚) 자가 들어간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채 초야에 묻혀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담은 것이리라.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칠우칠곡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칠우칠곡

칠우대(七友臺)로 시작되는 칠곡이 칠리계(七里溪)에서 끝나면 바로 선유구곡으로 이어진다. 선유구곡에선 구곡의 이름자를 찾는 과정이 재미나다. 계곡 속 숨은 글씨 찾기다. 제1곡의 옥하대(玉霞臺)는 기록으로만 전해져 그 각자(刻字)를 찾을 수 없지만 2곡의 영사석(靈사石), 3곡 활청담(活淸潭), 4곡 세심대(洗心臺), 5곡 관란담(觀瀾潭), 6곡 탁청대(濯淸臺), 7곡 영귀암(詠歸巖), 8곡 난생뢰(鸞笙뢰), 9곡 옥석대(玉석臺) 등의 각자는 약간의 품만 들이면 찾아낼 수 있다. 구곡의 절경만큼이나 글자 자체의 감동도 제법 크다.

그 각자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팁을 준다면, 해당 구곡의 절경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주변을 주목하시라. 각자는 절경에 새겨진 게 아니라 그 풍경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한다.

선유구곡-난생뢰
선유구곡-난생뢰
선유구곡-세심대
선유구곡-세심대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선우구곡의 학천정 앞 바위
문경-선유동천나들길 선우구곡의 학천정 앞 바위

선유구곡의 끝자락에 도암 이재 선생을 기리는 학천정이 있다. 학천정 맞은편엔 넓은 바위 절벽이 있다. 딱 글을 남기기 좋게 생긴 바위다. 거무튀튀한 바위엔 먹물이 배인 듯하다. 오랜 세월 선유구곡을 오간 많은 이들의 감상이 그곳에 쓰여졌다 지워지길 수없이 반복한 것처럼.

고모산성의 호쾌한 시야를 품은 토천길

다음으로 찾은 문경의 길은 옛 영남대로, 일명 토천(兎遷)길이다. 진남역 인근에 영강의 물줄기를 가로막고 선 깎아지른 벼랑에 놓인 옛길이다. 이 벼랑을 타고 오르내리는 좁디 좁은 길이 영남대로의 옛길이었다고 한다.

문경-토천길
문경-토천길

이 벼랑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처음 찾아냈다고 전해진다. 벼랑 위에서 길이 끊겨 고민하던 중 토끼가 벼랑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따라가서 이 길을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토천이다. 널찍한 검은 바위 위에는 짚신을 얹어 놓으면 맞는 발 모양의 홈이 서너 개 움푹 패어있다. 긴긴 세월 사람들의 발길이 닦아놓은 흔적이다.

문경-고모산성
문경-고모산성
문경-고모산성
문경-고모산성
문경-고모산성
문경-고모산성

이 토천길은 고모산성으로 이어진다. 고모산성은 휘도는 강물과 이를 감싼 절벽으로 이뤄진 절경인 진남교반을 감상하는 최고의 전망대다. 산성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이 호쾌하다.

길 중의 길, 역시 문경새재

새재에 이르렀을 때는 오후 6시가 넘었다. 해는 산등성이 너머 숨었고, 바람은 시원했다. 언제 폭염이 있었냐는 듯 새재의 공기는 상쾌했다. 어느덧 가을 냄새가 나는 듯했다.

문경-문경새재 입구 가장자리에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잎
문경-문경새재 입구 가장자리에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잎

고개를 들어보니 단풍나무 이파리들의 색이 바랬다. 뙤약볕에 흠씬 두들겨 맞아 녹초가 된 듯한 색깔이다. 그 지쳐 보이는 이파리의 가장자리엔 빨간 가을빛이 물들고 있었다. 이렇게 여름도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새재는 역시 새재였다. 최고의 걷는 길이라는 이름값 그대로였다. 조선 태종때 개척됐다는 문경새재는 서울과 영남을 잇는 대표적인 길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후 이곳에 3곳의 문을 달았다. 선조 27년(1594년)에 중턱에 2관문 조곡관이 세워지고, 숙종 34년(1708년)에 입구의 주흘관(1관문)과 고갯마루의 조령관(3관문)이 세워졌다. 1관문에서 3관문까지 6.3㎞ 전 구간이 아름다운 흙길로 남아있다.

문경-문경새재 발씻는 곳
문경-문경새재 발씻는 곳
문경-문경새재
문경-문경새재

1관문을 지나 이어진 길은 초록 터널이 하늘을 가렸고, 바로 옆 계곡에서도 풍성한 물이 우렁차게 흘러내렸다. 한없이 뉘어진 길은 평탄했고 부드러웠다. 탐방객 상당수는 맨발로 그 길을 걸었다. 덩달아 맨발로 따라 나섰다. 흙바닥은 낮에 데워진 온기로 따뜻했다. 흙길은 돌멩이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영남감사 이취임식이 열리던 교구정을 지날 때 계곡으로 내려가 얼굴을 씻고 발을 담궜다. 짜릿한 상쾌함이 번졌다. 오늘 하루의 찐득찐득함이 씻겨지는 듯했다. 폭염과 싸우며 걸었던 힘겨운 대낮 행군에 대한 충분한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힘든 여름을 견뎌낸 것에 대한 보답인가 보다.

조곡관에 다다를 무렵 사위가 어둑해졌다. 낮과 밤이 교대하는 시간. 숲의 생명이 본격적으로 꿈틀대기 시작하는 마법의 시간이다. 날짐승 들짐승들의 부산한 움직임에 숲이 출렁거렸다.

조곡관에 이른 뒤, 내처 3관문까지 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고개를 넘어가는 시원해진 여름 바람이 넌지시 등을 떠민다. 야밤의 새재길, 달은 뜨려나.

문경=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22일 문경새재 맨발페스티벌 열려

고운 흙길인 문경새재에선 22일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2015 문경새재 맨발페스티벌’이 열린다. 새재의 황톳길을 함께 맨발로 걷는 행사로 오전 10시 시작된다. 참가비 1만원. 고급 티셔츠와 국수가 제공된다. 문의 (053)755-5881

선유동천나들길 초입은 우회도로 공사가 진행돼 어수선하다. 학천정 인근에 차를 대고 거꾸로 걸어 내려오는 것도 방법이다.

옛 영남대로 토천길 답사는 진남휴게소에서 시작하면 된다. 카트월드 옆으로 고모산성과 토천길로 오르는 길이 연결된다.

문경산채비빔밥
문경산채비빔밥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산채비빔밥집이 있다. 새재 주차장 인근 유스호스텔 뒤에 있는 문경산채비빔밥이다. 여느 관광지 앞 식당과 달리 분위기가 고급스럽다.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산채비빔밥도 정갈하다. 산채 등 대부분 재료는 문경에서 나는 것들로 쓴다고. 기본인 A코스는 1만원. 여러 찬이 더해진 B코스(1만7,000원)와 C코스(2만5,000원)도 있다. 예약제로만 운영되니 전화는 필수. (054)571-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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