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엣가시 래퍼, 이란 홍보 첨병으로… 철퇴 휘두르던 당국도 인식변화
러시아선 옛 소련 향수 자극, 붉은별 탱크·오토바이 등장 뮤비
“페르시아만 무장은 우리의 절대적 권리, 누구도 평화적 핵 권리를 부인할 수 없어.”(아미르 타탈루)
“어머니 러시아에 축배를! 축배를!”(티마티와 엘원)
이란의 유명 언더그라운드 래퍼이자 서방 문화 추종자로 당국의 눈엣가시였던 아미르 타탈루가 이란 핵협상 타결 하루 전인 지난달 13일 새 뮤직비디오를 내놨다. 곡 제목은 원자력을 뜻하는 ‘에너지 하스티’. 그는 뮤직비디오 속에서 이란 해군 군함에 올라 자기 방어권은 절대적 권리이며 이란의 핵 주권은 평화를 위해 지켜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의 래퍼 티마티 역시 최근 구소련에 대한 향수를 그린 곡을 내놓아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티마티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는 일렉트로닉이나 록 음악가들이 구소련을 주제로 한 곡을 잇따라 선보이며 유행을 선도하는 중이다.
이처럼 이란과 러시아 등 대표적 반서방 노선 국가에서 서구 대중문화 형식을 이용해 반서구적 가치와 민족주의를 외치는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이란 러시아 정부도 과거 서양문화의 유입을 차단하던 과거 정책은 버리고 이들 젊은 예술가들을 적극 대중들에게 노출시키고 있다.
타탈루, ‘서구화된 악’으로 수난 수차례
10년 째 예명 ‘아미르 타탈루’로 활동하고 있는 아미르 호세인 마흐수들루(32)는 이란에서 손꼽히는 래퍼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서 그의 소식을 받아보는 팬이 140만명, 페이스북은 120만명에 달한다. 이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타탈루의 노래는 이란 TV나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없다. 이란의 가수나 영화 감독 등이 작품을 대중들에게 공개하려면 문화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타탈루는 그 동안 서양 문화를 좇는 데다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의 곡을 내 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승인을 거부당했다. 이 때문에 그의 무대는 유투브 등 인터넷 공간으로 제한돼 왔지만, 업로드된 영상마다 조회수가 수십만건을 기록할 정도로 영향력이 상당하다.
이란 당국은 최근까지도 타탈루를 ‘서구화된 폭력배’ ‘악을 조장하는 인간’ 등으로 칭하며 비난해왔다. 2013년에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지역사회를 단속하는 이란의 도덕경찰이 타탈루를 불법 위성방송 채널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체포하기도 했다. 당시 마수드 자헤디안 도덕 경찰청장은 “언더그라운드 무대서 활동하는 가수들은 활동을 멈추고 합법적 틀 안에서만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며 엄중 경고하기도 했다.
이란 당국의 이런 조치는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 없었다. 타탈루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위성방송 채널과 직접적 연관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나 엄청난 인기를 입증했다.
이렇게 정부와 각을 세우며 활동하던 타탈루가 갑자기 정권 홍보의 첨병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신곡 ‘에너지 하스티’의 뮤직비디오에서 쉴새 없이 이란의 군사, 핵 권리를 외친다. 이란 병사를 연상시키는 군복 입은 남성 여러 명을 배경에 두고 “무기는 당신의 터전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는 랩을 쏟아낸다. 이란의 월간 잡지 샤파케 아프탑의 부편집장 아미르 호세인 라사엘은 타임지에 “정부가 ‘사탄’이라 불러왔던 타탈루가 이 같은 곡과 뮤직비디오를 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 아우르려 서양식 문화 끌어안아
이란 정부는 지금까지 서양식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에 철퇴를 휘둘러 왔다. 지난해 9월에는 미국 가수 퍼렐 윌리엄스의 히트곡 ‘해피’(Happy)에 맞춰 춤을 추는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이란 남녀 7명에게 공공순결을 해쳤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3년과 태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이란 여배우 라일라 하타미가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질 자콥 집행위원장과 볼에 입맞춤을 하는 서양식 인사를 해 제재 조치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가주의를 내세운 서양식 음악과 영화에 대중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자 이란 당국자들과 문화 생산자들은 자신의 인식이 틀렸음을 감지하게 된다. 한 이란 정부 인사는 가디언에 “젊은 세대를 우리 편으로 되찾아올 수 있는 방법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라며 “그들은 더 이상 국가가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메시지를 소화하려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최근 이런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대표적 인물은 영화감독인 마수하드 데나마키이다. 그는 감독으로 데뷔하기 직전 이란 보수 군사단체 안사르 에 헤즈볼라를 이끌었다. 데나마키 감독은 3부작 ‘추방자들’ 에서 마약 중독이나 강도, 폭력 등 범죄로 인해 사회적으로 추방당한 주인공들이 결국 정권의 도움으로 이상적인 시민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다. 따분할 듯한 이 영화가 성공한 것은 주제곡으로 삽입한 팝송 덕분. 원래 이란 문화부는 승인을 거부한 금지곡들이다.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이 평소 듣기 힘든 금지곡들에 관심을 쏟은 것이다.
데나마키의 시도가 성공하자 다른 친정부 성향 감독들 역시 영화에 쓸 음악을 구하기 위해 언더그라운드 무대서 활동하는 래퍼나 록 밴드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이란-이라크전에 자원 병사로 참전해 최전선에서 싸웠던 친정부 성향의 한 영화 감독은 이란 주간지 테헤란 뷰로에 “당국으로부터 허가 받지 못한 곡이든 정치적으로 나쁘게 평가 받는 곡이든 상관하지 않고 발굴 중”이라며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젊은 세대들이 듣는 음악이고, 우리가 끌어 안아야 할 음악이며, 궁극적으로 젊은이들이 우릴 위해 나설 수 있게 만드는 매개다”라고 설명했다.
러시아에선 ‘구소련 향수’ 대중음악 열풍
서방과 지속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에서도 최근 ‘옛 소련의 향수’를 주제로 한 랩과 일렉트로닉 음악 등이 크게 유행하면서 보수층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러시아 유명 래퍼 티마티와 엘원은 최근 구소련 당시 범국가적으로 시행됐던 신체단련프로그램 ‘노동과 국방을 위한 준비’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 ‘절벽’을 발표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민 단결을 꾀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티마티와 엘원이 이 곡을 발표하며 함께 내놓은 뮤직비디오에는 미국식 힙합 뮤직비디오에서 빠지지 않는 미모의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다. 미국 뮤직비디오와 다른 점은 이 미녀들이 구소련을 상징하는 붉은별을 단 오토바이를 타고 티마티와 엘원이 구소련 탱크를 탄 채 랩을 한다는 것이다. 티마티는 노래가 시작하기 전 구소련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던 재즈 뮤지션 레오니드 유티오소프의 작품에서 따온 “어머니 러시아에 축배를!”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티마티는 한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힙합은 그들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를 그린다”면서 “러시아에서 힙합을 하는 우리도 같은 이유에서 구소련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티마티가 큰 인기를 얻자 다른 러시아 젊은 음악가들도 구소련을 주제로 한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텐디제이즈는 미국식 랩과 구소련 재즈 형식을 섞어 ‘공산주의 시대’를 주제로 한 음악을 선보였고, 20대 청년 에리카 키셀요바와 알렉산더 콜루파이에프 역시 신디사이저와 기타를 연주해 만든 곡 ‘구소련의 마지막 날’을 내놨다. 이 곡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91년 당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며 발표했던 연설로 시작한다. 콜루파이에프는 “구소련 역사를 책이나 부모, 조부모를 통해서 배웠고 그 특유의 수사법이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유행 번지며 효과도 점차 드러나
서구 대중문화의 형식에 자국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결합하는 새로운 대중문화는 정치ㆍ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고 있다. 나랏일과 기성세대 목소리에 관심 갖지 않던 젊은이들이 이런 대중음악을 통해 국가 메시지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보수층이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나지스 바조흐리 미 뉴욕대 인류학 박사는 테헤란 뷰로를 통해 “효과를 양적으로 증명해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변화들은 감지되고 있다”며”“이란-이라크전에서 숨진 군 잠수부 175명의 시신이 최근 발견돼 지난달 국민장이 열렸는데, 좀처럼 국가 주도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대거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라사엘 편집장도 “이란 보수층들이 자국의 젊은 세대가 향유하는 서방 문화가 오히려 민족주의, 애국주의 등 확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온라인 문화잡지 룩앳미의 아트욤 마카르스키 편집장은 “소련 음악은 러시아 젊은 예술가들에 점차 ‘창의적 토대’가 되고 있다”며 “이들은 러시아의 연속성을 찾으려 하고 있는데, 보수층들은 이 같은 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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