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 특히 철학자는 현실과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겨진다. 철학자의 현실에 대한 무심함은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의 일화로도 인구에 회자된다. 어느 날 탈레스가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졌다. 이를 본 하녀가 말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다 한 치 발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군요.”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가 이 모양이었으니 후학들은 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현실에 무심하거나 무지했던 철학자의 일화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만큼이나 많다. 탈레스의 일화에서 보듯 철학이 우주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 시작됐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철학이 현실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정이 몰락한 뒤 현실 정치 문제의 올바름에 대한 성찰로 철학을 시작한 이래 현대 프랑스 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관심사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이었다. 이는 ‘정치학’을 남긴 아리스토텔레스도,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철학의 위안’을 쓴 보에티우스도, ‘영구평화론’을 집필한 칸트도, 근대 시민 사회의 기초를 마련한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도, 1차 세계대전 뒤의 폐허에서 기존의 형이상학 전통에 이의를 제기한 하이데거도 다르지 않다.
삶과 철학은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고, 철학자는 삶에서 유래하는 문제를 개념 속에 포착함으로써 이를 더 근원적으로, 깊이 있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일 뿐이다. 문제는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이 깊이의 도가 지나쳐 철학이 삶의 구체적인 언어로 옮기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철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여기서 유래한다. 어찌 보면 제도권 대학의 강단 철학이 외면되는 것도 깊이가 지나쳐 현실에 대한 설명력이 떨어지는 영미 철학, 독일 철학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대학 철학과가 로스쿨 준비 과정으로 전락하는 사이,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인기를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푸코의 이론이, 들뢰즈의 사유가, 라캉의 분석틀이 현대 국가의 권력과 자본주의, 문화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갖춘 것이다. 그래서인가,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이들의 주류도 대학 철학과 출신들이 아니다. 문학이나 역사, 예술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이다. 국가 권력뿐 아니라 학문과 문화예술까지 복속시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현실에 의문을 품은 직장인들이다. 철학의 개념과 사유로 현실의 고단한 삶을 분석,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젊은 친구들이다.
그러니까 인문학의 주기능도 창조경제의 동력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삶터에 대한 성찰이다. 자신의 사유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계기로 ‘인문학, 삶을 말하다’란 시리즈를 기획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동안 벼려온 개념과 사유로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파헤치고 이를 세상에 내놓자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하지 않거나 못하던 발언을 하자는 것이다. 인문학자, 특히 철학자가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다듬어온 개념과 사유라는 무기가 있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오래 전 하늘만 바라보다 우물에 빠진 탈레스에게도 반전 카드가 있었다. 당시 이미 개기 일식을 예측한 것으로 알려진 탈레스는 하늘의 변화에서 날씨의 변화도 알 수 있었던 모양이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던 그는 어느 해 올리브의 풍작을 감지해 올리브 짜는 기계를 독점 계약한다. 탈레스가 올리브 짜는 기계를 독점해 돈을 번 것은 글만 읽던 ‘허생전’의 허생이 말총을 매점매석해 돈을 번 것과 비슷하다. 반전은 통쾌하지만 어쩐지 철학자답지 않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오늘날, 철학자들이 준비하고 있는 반전 카드는 무엇일까?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