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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소떼 몰고 北으로… 경제교류 봇물 화해 모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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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소떼 몰고 北으로… 경제교류 봇물 화해 모드로"

입력
2015.08.1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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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회장 평생의 꿈 금강산 개발

대선 겨냥 직접 아이디어 내

우리 경제에도 北 노동력 활용을

北에 전력 공급 땐 큰 선물 될 것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1998년 '소떼 방북' 당시의 사진이 실린 책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1998년 '소떼 방북' 당시의 사진이 실린 책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1998년 6월16일 오전 9시6분. 황소 8마리를 실은 트럭 1대가 판문점 군사 분계선에 잠시 멈춰 선 뒤 북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소 500마리가 트럭 50대에 실려 차례로 군사 분계선을 지나갔고, 오전 10시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다.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소떼 방북’은 이렇게 이뤄졌다. 미국 CNN이 이 장면을 생중계했고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20세기의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표현했다.

이익치(71) 전 현대증권 회장은 당시 박세용 현대상선 사장, 김윤규 현대건설 부사장과 함께 정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에 동행한 핵심 측근이다. 그는 11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결국 북한하고 모든 걸 풀어야 한다”며 “적개심을 없애고 북한의 1,000만 노동자를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떼 방북은 어떻게 시작됐나.

“1997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 있다. 1992년 대선 때 도전에 실패한 정주영 회장은 97년 대선 때 한번 더 출마하려고 했다. 그런데 준비가 부족해 힘들다고 했더니, 정 회장은‘나는 평생의 꿈이 금강산을 개발해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소떼 방북은 대선을 준비하며 생각한 프로젝트다. 정 회장은 평소 ‘무서울 게 하나 없지만 전쟁만큼은 무섭다’며 ‘똑똑하고 훌륭한 우리 백성이 서로 싸우면서 죽어서야 되겠냐’고 자주 얘기했다. 1989년 정 회장이 첫 방북한 이후 금강산 개발이 지지부진했는데 평화를 위해 다시 해보자며 아들인 고 정몽헌 회장과 내게 지시했다.”

-소떼 방북 아이디어는 누가 냈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으로 가는 수백 마리 소들을 연결하는 끈을 잡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으로 가는 수백 마리 소들을 연결하는 끈을 잡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금강산 개발 관련해 사전 협의가 이뤄져 북한과 계약하는 날짜까지 잡혔는데, 정주영 회장이 육로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엔 비행기로 베이징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고, 육로 방북은 유엔군과 북한 군부의 동의가 필요했다. 북한에서도 김용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장이 군부를 설득할 명분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이 당시 서산에 키우던 소를 몰고 가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1년에 1,000마리씩 키워 북한에 보내는데 소를 하늘로 보낼 수 없으니 걸어서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북한 군부에서 좋다고 했다. 북한에서 소는 남한과 달리 보물 같은 존재다. 결국 정 회장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북한으로 보내는 소를 실은 차량이 환송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진각에서 북으로 출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북한으로 보내는 소를 실은 차량이 환송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진각에서 북으로 출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떼와 관련된 소동이 있었다던데.

“소를 몰고 간 뒤 북한에서 난리가 났다. 신경 써 관리한 소들이 수십마리 죽었다. 해부해 보니 위에서 어구(물고기 잡는 그물)가 잔뜩 나왔다. 북한에서는 남측이 일부러 넣은 것이라며 소동이 벌어졌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간척지인 서산 농장에 방목된 소들이 짭짤한 맛이 나는 어구들을 먹은 것이다. 검사 결과 추가로 보낼 소들의 80% 가량에서 뱃 속에 이물질이 발견 됐다. 여기서 건강하게 자라면서 이물질을 견뎠는데 북한에서 환경이 달라지니 견디지 못한 것이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남은 어땠나.

“김 위원장은 남한의 빠른 경제 성장에 관심을 보이며 비결을 알려 달라고 했다. 정주영 회장은 혹시라도 말 실수를 할까봐 나더러 이야기하라고 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경제 기본계획을 정주영 회장이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나중에 정 회장은 ‘김 위원장 앞에서 박 대통령을 그렇게 칭찬하면 어떡하냐’고 했는데 김 위원장은 ‘좋은 말씀 많이 들었다’며 ‘박 대통령 따님이 계시죠?’라고 물었다. 그 후 몇 년 지나 당시 박근혜 의원이 북한 초청을 받아 가게 됐다.”

-소떼 방북 이후 남북한 경제교류가 본격화됐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 사망 후 3년상을 치르며 일체 외부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러시아의 푸틴이 찾아와 공짜로 가스를 줄 테니 남한과 파이프를 연결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는데도 거절했다는 말을 했다. ‘소련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북한이 중국과 관계가 좋은 것으로 알았는데 김 위원장은 고구려 후손이라 그런지 중국 사람도 못 믿겠다고 했다. 북한 정권 자체가 항일 빨치산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부하는 만큼 일본에 대한 감정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북한은 그때부터 남한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개성공단이 만들어졌다.

“북한에서 경제개발을 하겠다며 우리더러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이 우리 설비를 북한에 가져가 활용하면 경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봤다. 김정일 위원장은 처음에 공단 위치로 신의주를 제의했는데 내가 개성을 주장했다. 그랬더니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이 거기는 비무장지대(DMZ) 근처 군사요충지라며, 어떤 (군사) 설비가 있는지 아느냐고 펄쩍 뛰었다. 그때 김 위원장이 개성을 제안한 이유를 묻길래, 공단에서 제품이 나오면 미국 일본 등 해외로 팔아야 하는데 물건 실어 나르기 가깝고 공단에서 꼭 필요한 전력을 남한에서 송전 받기 좋은 곳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로 개성 땅을 둘러 볼 수 있게 지시했다.”

-화해 무드로 남북 정상회담까지 이어졌다.

“현대가 북한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철도ㆍ도로 건설, 통신ㆍ인터넷 사업, 발전ㆍ전력공급 사업, 통천 비행장 건설, 관광지 개발, 금강산 저수지 물 이용, 임진강 댐 건설 등 7개 사업을 맡았다. 그때 정주영 회장이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철도 깔고 대형 공장 지으며 북한 주민들과 접촉할 텐데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정부간 협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정상회담으로 연결됐다.

-지금 남북관계가 교착 상태인데 어떻게 풀어야 하나.

“결국 우리 경제를 위해서도 북한이 필요하다. 정주영 회장은 그 당시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하려고 했다. 향후 20,30년 동안 북한 사람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기업인들은 산업일꾼을 많이 만들어 남북한 젊은이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야 한다.”

-통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올 수도 있다. 통일이 되면 국민 모두가 좋아졌다고 체감해야 하는데 북한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식량과 전기 두 가지다. 식량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전기는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 부족하던 전기가 원활하게 공급되면 북한 사람들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남한 체제의 우월함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준규기자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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