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2015 피스&그린보트’ 기항지인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오션드림호에 오른 간 나오토(菅直人ㆍ69) 전 일본 총리를 한국일보 황영식 논설실장이 단독으로 만났다. 간 전 총리는 2010년 한일병합 100년에 맞춰 일본의 강제병합을 우회적으로 시인하는 총리담화를 내고 조선왕조의궤를 한국에 넘겨주었다.
-2010년 담화 발표 때 가장 신경을 썼던 것과 특기할 점은.
“2010년은 한일병합 100년이 되던 해였다. 한일 양국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은 역시 잘못됐다. 제국주의적 침략의 결과였다고 인식했고 그런 생각을 솔직한 말로 표현했다. 그런 인식에 대해서는 지금도 같다. 당시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는 빼고 한국에 대해, 그러니까 한일 양국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일병합이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라는 인식은 과거 한일기본조약의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에 대한 일본정부의 종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데, 그 때문에 일본 우파의 비판이나 반발을 받지는 않았나.
“한일기본조약이 언급한 합병조약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과 시각이 있고, 한일 양국에도 여러 인식이 있다. 그러나 2010년 담화는 법률해석 담화가 아니었다. 법적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잘못됐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 국내에서 담화에 대한 반발은 없었다.”
-한국에서는 간 총리 담화의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알고 있나.
“한국을 자주 찾고 있고, 언론을 통해서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2010년 당시 간 담화에 대한 한국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평가도 그랬다.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했을 뿐이라는 게 언론의 주된 반응이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전혀 들지 않았다. 한일 관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 당시 일본 국회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김 대통령은 일본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잊을 수는 없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일본 민주주의 힘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과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반성하고 미래를 향해 더욱 우호관계를 넓혀가자는 내용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기분으로 담화를 발표했다. 조금이라도 우호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서 조선왕실의궤 반환 등의 조치를 했을 뿐이지, 평가가 좋고 나쁘고는 상관이 없어서 무관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14일 발표될 아베 담화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최종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을 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나도 그 향방에 주목하고 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발표는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당, 사키가케와의 연립내각에서 이뤄졌다. 당시 사키가케의 정조회장으로서, 이번에 발표될 아베 담화도 무라야마 담화의 인식을 제대로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베 담화에는 반성이라는 표현은 들어가도 사죄 표명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되데.
“아직 발표된 것이 아니어서 지금으로서는 무라야마 담화에서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만 말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와 갈등을 빚어온 아베 정권의 정책에 대해 평가해 달라.
“아베 총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전력(前歷)이 잘못됐다는 인식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베 1차 내각에서는 그나마 국회에서 내가 매섭게 추궁하자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는데, 2차 내각에서는 그것이 완전한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후퇴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문제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병목(bottle-neck)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혹시 해결책이 있나.
“내가 총리가 되기 전에 여러 사람이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고노 담화나 아시아여성기금 등이 그런 결과였다. 상대방의 선의를 서로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양국이 거의 타협에 이르렀다고 보는데 그것이 이뤄지지 못해 아쉽다.”
대담=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정리=최진환기자 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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