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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사전] 비례

입력
2015.08.1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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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는 시청률이 평균 28.7%, 최종회는 42.2%를 달성했다. 주인공이 입버릇처럼 던지는 대사 “당하면 되갚는다, 배로 되갚는다!!”가 20년에 걸친 포스트버블시대 일본 서민의 상황과 심정을 대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배로 갚는 것은 당한 만큼만 갚는 것에 비교해서 일종의 징벌적 손해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등에서 법으로 시행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눈에는 눈으로”라는 소박한 원리에 비해서는 가혹하달 수 있지만 대개 나름의 일정한 비례 원칙에 따라 운용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의하면 이명박 정권이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위산업) 비리로 낭비한 혈세가 무려 100조원이라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직후 대기업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와 관련해 “최대 10배까지 배상액을 확대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의 비례 원리를 이명박 정권에 적용하면 무려 1,000조원이나 되는 셈이다.

비례(比例)란 ‘proportion’의 번역어다. 근대 이전까지 한자어 ‘비례’는 주로 예를 들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영어 단어 ‘proportion’은 ‘portion’(부분, 몫) 앞에 접두사 ‘pro’(여기서는 ‘for’의 뜻)가 붙은 것인데, 크기, 양, 정도 등에 있어서 한 부분이 다른 더 큰 부분이나 전체에 대해서 갖는 올바른 관계란 의미로 14세기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비(比)의 갑골문 형태는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고대 중국 시가집 ‘시경(詩經)’의 주요 레토릭으로서 비(比)는 노래하고자 하는 대상과 유사한 것을 다룸으로써 비유하는 수법을 가리켰고, 반면 흥(興)은 연애나 풍자 등을 노래하기에 앞서 먼저 다른 사물로써 감흥을 일으키는 수법이었다.

유럽의 경우, 수학적 비례를 집중적,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작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겹도록 배웠던, 수의 비율이나 도형의 닮은 꼴, 비례식의 원리는 다 거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수학책 ‘구장산술(九章算術)’도 비례를 다루기는 하지만 이 책 자체는 일종의 문제집이어서 유클리드처럼 비례 원리 자체를 추상적, 일반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이 책의 많은 문제들이 “그 몇이냐(幾何)”로 끝난다는 점이 기하학이란 번역어와 관련해서 아주 흥미롭다.

‘proportion’은 비례라는 뜻 말고도 비율이란 뜻도 갖는데, 비율을 뜻하는 다른 말로는 ‘ratio’가 있다. ‘ratio’는 그 형태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이성적인(rational)과 같은 어원을 지닌다. 비율이나 비례에 맞는 게 합리적이란 취지다. 이쯤 되면, 미리 정해진 몫에 따라 할당해서 나눠주는 게 바로 군대 배급품 ‘레이션’이라는 정도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라틴어 ‘ratio’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의 번역어로 쓰였는데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전체와의 조화 및 이 조화의 근간이 되는 비례에 기대서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미적인 것을 추구했다. 비례나 비율과 관련해서, 두 정수로 이루어진 비 내지는 분수로 나타낼 수 있는 실수가 바로 유리수다. 반면에 ‘irrational’은 정수들의 비로 나타낼 수가 없는 것들을 가리켰는데, 무리수가 아니라 무비수라고 번역했더라면 약분이나 통분을 더 쉽게 익혔을 수도 있다.

비(比)에 재방 변을 붙이면 비(批)가 된다. 오늘날에는 비판하다, 비평하다는 의미지만 애당초에는 손으로 친다는 뜻이었다. 소선구제에서는 낮은 지지율의 당선자가 모든 것을 독식함으로써 다른 정당의 정치적 몫을 횡탈해버린다. 비례대표제는 주권자인 국민들의 정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고, 이에 비례하는 권력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꼭 확대해야 할 제도다.

한국의 선거법과 선거제도는 그 실제 효력에서 헌법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 여당이 기득권 때문에 비례대표제를 끈질기게 반대하고 있다면, 어원에 따라서 주먹에 의한 비판을 가해야 마땅하다. 한국의 정치 현실은 중국의 위대한 소설가 루쉰의 말대로 아직 페어플레이가 이른 수준이다. 루쉰은, 미친 개는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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