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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예비회담 중 "따로 만나자" 쪽지, 비밀접촉 급물살… 이후락, 김일성 심야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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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예비회담 중 "따로 만나자" 쪽지, 비밀접촉 급물살… 이후락, 김일성 심야 면담

입력
2015.08.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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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협상 참여한 이병웅씨 회고

71년 11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제9차 예비 회담장. 회담 의제인 이산가족의 범위를 둘러싸고 북한이 친구를 포함시키자고 주장해 오는 바람에 남북한이 샅바 싸움을 벌이던 무렵이었다. 공전하는 회담 분위기에 답답해 하던 중앙정보부 국장 출신의 정홍진 남측 대표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덕현 북한 차석대표에게 비행기처럼 접은 쪽지를 날려 보냈다. “따로 만나자”는 메시지였다. 두 사람은 공식 회담을 끝내고 난 오후 같은 장소에 다시 마주 앉았다. 당시 정홍진의 수행원으로 동행했던 이병웅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특보는 지난 달 30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7ㆍ4 성명이 만들어지기 위한 비밀접촉이 시작됐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7·4 성명 초안 작성을 끝낸 남북한 실무자들이 1972년 6월 28일 판문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병웅(오른쪽)씨 제공.
7·4 성명 초안 작성을 끝낸 남북한 실무자들이 1972년 6월 28일 판문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병웅(오른쪽)씨 제공.

이후 비밀접촉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72년 3월 28일 정홍진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고, 4월 19일엔 북측 김덕현이 서울에 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고 간다. 그 뒤 5월 초엔 이후락의 방북이 이뤄졌고, 여기서 김일성과의 심야 면담이 이뤄진다. 5월 말에는 건강이 안 좋은 김영주를 대신해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에 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다.

6월 한달 동안 실무선에서는 7ㆍ4 성명 초안을 마련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이 전 특보는 “남측에선 정홍진과 나, 북측에선 김덕현과 박세진이라는 수행원 등 4명이 자유의 집과 판문각을 매주 오가며 문안 작업을 순조롭게 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발목을 잡은 것은 서명이었다.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쓰지 못한다고 버텼고, 북한 역시 대한민국이 안 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실체는 인정하지만 체제는 수용할 수 없다는 일종의 기 싸움이었다. 결국 나라 이름 없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 라고 적는 것으로 마무리 됐고 양측은 7월 4일 각자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 전 특보는 “7ㆍ4 성명도 처음 시작은 적십자회담이었다”며 “이산가족 상봉 등 쉬운 문제부터 풀기 위해 일단 만나면 더 크고 복잡한 문제도 풀리지 않겠냐”고 말했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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