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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에 끌려온 '조선인 아픔'은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입력
2015.08.1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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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역사 밝히겠다는 日 약속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씁쓸'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주력 탄광이었던 군함도의 모습. 이곳에서 조선인 강제징용은 여전히 지워진 역사였다. 나가사키=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주력 탄광이었던 군함도의 모습. 이곳에서 조선인 강제징용은 여전히 지워진 역사였다. 나가사키=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관련기사 ▶ '무도'가 들춘 하시마섬의 슬픔

피스&그린보트 항해 8일차인 9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는 군함도 탐방 일정의 관건은 역시 날씨였다. 군함도는 외해에 면해 있고 접안 시설이 부실해 조금이라도 파도가 높으면 배를 대기 어려운 곳이다. 다행히 오전 6시쯤 선상에서 내다본 나가사키(長崎) 항구의 날씨는 좋아 보였다.

하지만 오전 8시쯤 “태풍 영향권에 들었다”는 이유로 군함도 상륙 허가가 나지 않았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왔다. “비바람도 없고 파도도 잔잔한 데….” 일행은 짙은 아쉬움에 엄격하기로 소문난 일본의 안전의식을 책망하거나, 더러는 한국 단체관광객의 상륙을 고의로 방해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슴 한 켠에 품은 채 오전 9시 야마사해운이 운영하는 관광선에 몸을 실었다.

배 안에는 군함도 세계문화유산 선정을 축하하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군함도 사진과 함께 큼지막한 글씨로 ‘자존심(Pride), 나가사키의 소중한 정체성’이라고 써놓았다. 한껏 치솟은 일본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여기만이 아니다. 관광선 매표소는 물론 나가사키 거리에는 ‘메이지시대 산업혁명유산 세계문화유산 등록 결정!’이라고 적힌 축하 현수막이 자주 눈에 띄었다. 시내 관광상품 판매점에서는 군함도를 상품화한 과자, 술, 팬시용품 등이 이미 매장 진열대 한복판을 점령했다. 지난달 5일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기점으로 군함도는 빠르게 일본 큐슈 지역 근대화의 상징물로 자리잡아 가는 모습이었다.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19㎞ 떨어진 군함도는 길이 480m, 폭 160m, 둘레 1,200m의 작은 해저탄광섬이다. 원래 이름은 하시마(端島)인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옹벽이 섬 전체를 둘러싸고 고층의 철근 아파트가 늘어선 외관이 군함 ‘도사(土佐)’와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리게 됐다. 이 섬을 1890년 대표적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탄광 개발을 위해 매입했다. 이후 석탄 채굴이 사양산업화하자 미쓰비시는 1974년 탄광을 폐쇄하고 2001년 관할 자치단체에 섬 전체를 양도했다. 40여년 간 무인도로 버려졌던 군함도는 폐탄광 관광붐으로 2009년 1월 5일 세계문화유산 잠정리스트에 등재되면서 근대화 산업유산의 한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관광선이 출발한 지 40분 정도 지나 드디어 군함도가 보이자 관광객들은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전함의 선수와 닮은 뾰족한 섬 남단에 파도가 부딪치며 하얀색 포말을 일으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섬 위에는 짙은 회색과 거무튀튀한 색의 빈 콘크리트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관광선이 이 조그만 섬을 30분에 걸쳐 두 바퀴 느리게 선회하는 동안 안내원은 선내 방송으로 군함도의 내부 구조와 건물을 일일이 설명했다.

‘광산의 중심에 있던 벽돌 건물에는 탄광 노동자들을 위한 큰 공동목욕탕이 있었다’, ‘30호 아파트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7층 철근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였다’, ‘섬에는 25m짜리 수영장, 병원, 파친코, 영화관, 술집 등이 있었다’는 식의 소개가 이어졌다. 해면 아래 1,000m 부근까지 내려간 탄광 채굴작업이 기온 30도, 습도 95%, 그리고 가스가 암벽을 뚫고 분출하는 ‘가스돌출’ 현상 같은 악조건 속에 이뤄졌다는 대목에선 관광객 사이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본인 관광객 하마사카 요이치(61)씨는 “일본 사람도 그 동안 해저탄광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며 “메이지유신 시절부터 이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는 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내원의 설명에 여기서 일한 ‘광산의 남자들’ 중에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12년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곳에는 800여명의 조선인이 끌려왔으며 강제노동을 하다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사람만 122명이나 된다. 일본이 이 곳을 일본 산업혁명유산 23곳 중 한 곳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을 때 한국 정부가 강력 반발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방문객 등에게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한다’고 밝힌 일본 정부의 약속은 한 달이 지난 현재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여객항터미널, 관광선 내 어디에서도 강제징용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한일 외교당국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직전 발표한 일본 측 입장문에 사용된 강제징용 표현을 놓고 사후에 ‘강제노동(forced labor)이다’, ‘노동을 강요당한 것(forced to work)이다’로 갈려 싸운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조선인 강제징용은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는, 지워진 역사였다.

위원회가 채록한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가스돌출 위험이 있는 구역에 주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투입했다. 조선인은 고층아파트가 아니라 해안가 건물 아래층 ‘함바(노무자 숙소)’에서 생활했는데 군함도 주변은 파도가 매우 높고 거칠어 바닷물이 숙소 안으로 쏟아지기 일쑤였다. 심지어 군함도에 동원된 조선인 다수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복구작업에 투입돼 잔류 방사능에 노출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원폭이 투하된 것은 군함도를 찾은 이날로부터 정확히 70년 전인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2분이었다.

항구로 돌아오는 길 선실 대형 스크린에는 한때 도쿄 인구밀도의 9배나 됐던 군함도에서의 평화로운 일상을 담은 기록영상이 상영됐다. 이를 지켜보는 한국인의 마음은 복잡 미묘하다. 이시재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의 근대화 시설이 동아시아 침략전쟁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남의 잔치’에 반대만 하면 옹색해 보일 수 있다”며 “축하는 해주되 강제징용의 역사도 함께 지적해주자”고 애써 화를 눌렀다. 그러나 원폭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도 강제징용의 역사는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에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쿄대 대학원에서 문화경영을 전공하고 있는 이정선(35)씨는 “미국의 반대에도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을 아픈 역사라는 의미의 ‘부(負)의 유산(Negative heritage)’으로 표기한 일본이 강제징용 역사가 있는 군함도를 부의 유산으로 인정하는 데 반대하는 것은 이중적 태도”라고 꼬집었다.

나가사키=김영화기자 yaa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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