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만큼 친일 행적을 두고 논란이 많은 이도 드물 것이다. 친일 행적 자체는 명명백백하지만 무엇보다 그 의도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해석이 충돌하는데다, 그가 ‘변절’하기 전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의 대열에 적극 참여했고 또 뛰어난 문학인이었기 때문에 동정론이 만만치 않다.
친일 의도에 대해서는 우선 춘원 자신이 당당했다. 광복 직후 몸을 피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며 “소가 열 필이 와서 끌어도 이광수는 이 자리를 안 떠날 것이다. 이광수의 목을 베어 종로 네거리에 매달아 정말 친일파가 없어진다면 나의 할 일은 다한 것이오”라고 했다거나, 반민특위 조사관의 심문을 받으면서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徑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오”라고 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광수는 3ㆍ1운동의 서막이었던 일본 도쿄 2ㆍ8선언을 기초했다. 이 선언의 주축이었던 조선청년독립단을 대표해 상하이로 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을 거들었다. 안창호를 받들어 독립신문 편집국장도 맡았다. 그 시기를 전후해 한국 근대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어린 벗에게’ ‘무정’ 같은 소설을 썼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결국 북으로 끌려가 병사했지만, 북한이 춘원의 무덤을 평양에 옮겨 우리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대접한 것은 ‘매국’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과 탁월한 예술적 성과를 평가한 것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이광수는 ‘조선인의 타락한 민족성을 개조하여 독립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일본 통치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산업적, 교육적 훈련을 통해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일본은 조선 민족을 괴롭히는 적이 아니라 조선 민족이 보고 배워야 할 스승이었다.…그런데 이광수는 얼마 안 가 자기 논리의 결함을 깨달았다. 조선인을 일본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개조’하는 것보다는 조선인을 그냥 일본인으로 만드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결국 그는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바꿨고, 꿈도 일본어로 꾸는 모범적인 일본인이 되었다. 그의 주장에 위안을 얻었던 추종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나약하고 타락한 조선 민족을 그가 보기에 ‘세계 일등’인 일본 민족으로 만들어주는 게 진정 조선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경향신문 2014년 9월 30일자 세상읽기 ‘다시 이광수의 시대’▶전문 보기)
새삼스레 이광수를 꺼낸 것은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친일과 반일이란 무엇인지, 애국과 매국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영화 ‘암살’의 흥행과 박근령 망언 사건은 우리가 여전히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 방증이 아닐까.
“70년 동안, 1960년의 4월혁명 이후 한 해 남짓, 1998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빼면 60년 가까운 세월의 대부분은 독재와 쿠데타, 지배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로 얼룩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강점 당한 민중이 가장 열망한 것은 진정한 독립과 자주였다. 그러나 광복 70년이 되는 현재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미군정에서부터 찾아야 마땅하다. 독일과 프랑스는 ‘친나치행위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는데 미군정은 오히려 친일분자들을 비호하고 중용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한민국은 친일파나 그 후손이 득세해서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대통령 박근혜와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다.”(미디어오늘 8월 7일자 김종철 칼럼 ‘친일파 후손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전문 보기)
“최근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암살’에서 황덕삼이 김원봉에게 암살작전 수행 중 어쩔 수 없을 땐 민간인을 죽여도 되느냐고 묻는다. 김원봉은 일본 민간인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대량살상을 할 수밖에 없는 핵무기는 김원봉의 철학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나는 영화 ‘암살’을 보면서, 만약 내가 당시 조선의 핵물리학자로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려고 했다면 김원봉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했다. 실제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적지 않은 과학자들은 자신이 만든 핵무기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조선의 과학자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제아무리 핵무기라 해도 친일 부역자를 처단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물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그 어떤 핵무기도 광복은 시켜줄 수 있지만 진정한 독립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일본군을 몰아낼 수는 있어도 밀정을 죽이고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지는 못했다. 염석진을 처단한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안옥윤의 총알이었다. “밀정이면 죽여라.” 핵무기도 해결하지 못한 임무, 광복 70주년에 더욱 사무친다.”(한국일보 8월 10일자 이종필의 제5원소 ‘물리학자보다 위대했던 저격수’▶전문 보기)
“베트남 전쟁은 ‘한국에게 신이 내린 선물’이라 표현한 어느 한국인 학자가 있다. 그 생각대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역사 교과서의 주안점은 전쟁특수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일본 역사 교과서의 주된 서술이 전쟁특수이듯이, 전투 한복판에서 재앙을 겪는 사람의 고통이 아니라, 멀찍이서 한국이 획득한 경제적 이득에 주목한 것이다.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재앙이 아니다. 전쟁은 제국의 힘겨루기다. 정복당한 국가는 전리품이자 전쟁특수의 원천이다. ‘베트남 전쟁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표현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점을 내면화한 것이다.
생각건대, 친일에서 일본은 기표이다. 친미, 친러시아, 친프랑스, 다 같은 것을 가리킨다. 제국주의라는 기의. 자신의 친일은 일본에 대한 친밀감일 뿐이라고 박근령이 한 말이 진실인지, 관심 없다. 다만 박정희의 친일은 친밀감에서 비롯한 게 아니었단 고백은 중요하다. 그는 친일, 친미를 하다가 말년에는 핵무기를 얻고자 반미(反美)를 마다치 않았다.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제국주의로 일관했던 것이다.
한국의 무력을 더욱 위협적으로 만들자, 혹은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자 등의 용맹한(?)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나는 그게 ‘친일’이라고 생각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했다.”(칼라밍 8월 9일 서종민 칼럼 ‘친일파는 너무 많다’▶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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