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그 해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ㆍ북한을 각각 분할 점령하면서 군정이 시작됐고, 주변 강대국의 이념 구도 속에 빨려 들어갔다.
특히 독립의 열망에 들떠 있던 한반도는 그 해 12월 미국ㆍ영국ㆍ소련 3국이 참여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담 결과로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신탁통치 추진이 결정되면서 남한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 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다. 남북은 신탁통치 반대와 찬성, 좌파와 우파로 분열됐고, 남북 모두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1948년 분단정부 수립이 가시화하면서 남북 통합의 노력이 뒤늦게 불붙었다. 김구 선생 등이 북한을 방문해 단일정부 구성을 촉구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남한에서는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됐고,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은 남북을 가르는 실질적 분단선이 됐다.
이 시기 남북은 체제 경쟁에도 열을 올렸다. 식민지 시대 착취와 희생을 강요당했던 농민들을 위한 토지개혁이 최우선 순위였다. 북한은 46년 무상몰수ㆍ무상분배를 통한 토지개혁에 나섰고, 남한은 49년 유상몰수ㆍ유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시작했다.
이념을 바탕으로 한 체제 경쟁은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시대 최대의 비극으로 치닫는다. 동족상잔의 참상은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동현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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