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퍼형 족동식 펌프 널리 사용
7m 아래 물을 끌어올려 건기에도 경작 가능케
온돌형 건조장 동남아에 보급
호미·쟁기·가래 등 우리 농기구, 탁월한 적정기술 제품
1985년 미국 서부에 위치한 스탠포드대학교에서 기계공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마틴 피셔는 장래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갖기 위해 페루의 안데스산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이곳에서 극심한 빈곤을 목격하고 자신의 공학기술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사용하겠다고 결심한다. 페루에서 돌아온 피셔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적정기술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케냐로 향했다. 피셔는 케냐에서 평생의 동역자인 가구제작자 닉 문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당시 나이로비 빈민가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피셔와 문은 매일 저녁시간에 모여서 케냐 사람들을 빈곤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게 된다. 그들은 케냐 사람들의 70%가 농부이고 농부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개시설의 개발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은 1991년 마침내 농민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84 달러짜리 휴대용 수동식 펌프(수퍼 머니메이커펌프의 초기 모델)를 개발하고 아프로텍(Approtec, 뒷날 킥스타트로 이름을 바꿈)을 설립하였다. 20여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이 일군 성과는 눈부시다. 킥스타트(Kick Start,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킥스타터와는 다름)의 홈페이지(www.kictstart.org)에 따르면 2015년 6월 1일 현재 킥스타트를 통해 17만개의 비즈니스가 창출되었고, 86만명이 빈곤에서 탈출했다.
개발도상국에서 농업 및 관개시설의 중요성을 목격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 사람은 피셔만이 아니다. 콜로라도주에서 정신과 병원을 개업한 의사인 폴 폴락은 아내가 다니던 교회 선교팀과 함께 방글라데시를 방문하고 극심한 빈곤을 목격한다. 하루에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한 폴락은 1981년에 국제개발회사(IDE)를 설립했다. IDE의 설립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의 수입을 증대시켜서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IDE는 주로 소작농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관개와 소규모 시장을 통한 빈곤 감소(PRISM)’라는 독특한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이를 위해 ‘대나무 페달 펌프’와 ‘점적 관개시설(Drip irrigation Kit) 등을 보급하였다.
전 세계 극빈자 11억명 중 8억명이 시골에 거주하고 있으며, 8억 4,000만명 이상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 시골의 영양실조 비율이 도시지역보다 150% 정도 높다. 요약하면 개도국에서는 70% 정도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식량의 자급자족 비율도 낮고, 이를 통한 소득 증대는 더 어렵다. 이러한 현상을 야기하는 이유는 관개시설의 미비, 농사지을 물의 부족, 농사기술 및 도구의 부재 등이다.
관개 관련 적정기술
필자와 동년배인 사람들은 어렸을 때, 당시 듀엣으로 활동하였던 서수남씨와 하청일씨가 TV에서 광고한 모 펌프회사의 로고송인 “물 걱정을 마세요~ OO, OO 자동펌프~”라는 가사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지역에서는 논과 밭에 물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
물론 최근에는 태양광 시설을 이용해서 펌프를 작동하는 모델이 시범적으로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2009년에 한국의 한 기업이 몽골에 설치한 이런 시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개도국에 대량으로 보급되기에는 가격이 여전히 비싸다.
현재 개도국에 성공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는 관개 관련 적정기술 제품으로는 ‘족동식 펌프’가 있다. 족동식펌프는 선진국에서 운동기구로 사용하는 ‘스텝핑 머신(일명 스테퍼)’과 그 모습이 매우 유사하다. 족동식 펌프에는 사용한 재료에 따라서 철을 주로 사용한 킥스타트의 ‘수퍼머니메이커 펌프’와 대나무를 주로 사용해서 보다 저렴한 ‘대나무 페달 펌프’가 있다. 수퍼머니메이커 펌프는 7m 아래에 있는 물을 수원 위로 14m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 펌프를 사용하면 8시간 동안 8,000㎡ 넓이에 물을 공급할 수 있으므로, 이전에 비해서 보다 넓은 지역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또한 건기에도 과일과 채소 같은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으므로, 가구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수퍼머니메이커 펌프는 철로만 만드느냐 아니면 일부를 시멘트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가격대가 25~100달러 사이로 다양하다.
2009년에 방문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셀램이라는 곳에서는 실린더 부분을 시멘트로 만든 ‘족동식 펌프’를 25달러 정도에 판매하고 있었다. 적정기술 제품은 크게 ‘인간의 기본적 필요(Basic Human Needs)’를 만족시키기 위한 ‘생존형’ 또는 ‘문제해결형’ 적정기술제품과, 적정기술 제품의 사용을 통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생계형’ 또는 ‘가치창출형’ 적정기술제품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족동식 펌프는 대표적인 ‘생계형’ 적정기술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족동식 펌프와 유사한 수동식 펌프로서 ‘힙 펌프’가 있다. 힙 펌프는 선진국에서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기구와 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힙 펌프는 머니메이커 펌프보다 가볍고 가격도 저렴하다. 이 펌프는 어린이와 같이 다소 힘이 부족한 사람이 적은 면적에 물을 주기 위해 사용할 때 적당하다. 2014년에 탄자니아의 아루샤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에 힙 펌프를 보급한 적이 있는데, 이 학교 학생들은 힙 펌프를 사용해서 ‘빗물 저장시설’에 모은 물을 텃밭에 줄 수 있었다.
머니 메이커 펌프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13년 미국 새너제이에서 개최된 ‘제3회 국제 인본주의 기술 컨퍼런스(Global Humanitarian Technology Conference)에서 한 비정부기구(NGO)가 ‘적정기술’은 ‘사용자 중심의 기술’이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머니메이커 펌프의 초기 모델은 예상과는 달리 시장에서 잘 팔려나가지 않았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개도국에서는 여성들이 주로 일을 한다. 농사일도 마찬가지여서 여성들이 치마를 입고 족동식 펌프를 사용해서 농사를 짓는데, 초기의 머니메이커 펌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발을 높이 들어야 했고, 다리 부분이 많이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여성들이 이를 꺼렸기에 머니 메이커 펌프가 잘 팔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인지한 개발팀에서는 발을 높이 들지 않고도 펌프질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개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적정기술이 사용자와 현지의 맥락에 맞춰 적절하게 만들어져야 함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농사지을 물이 근처에 있을 경우에 족동식펌프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밭에 물을 줄 수 있는 적정기술로 점적 관개시설이 있다. 점적 관개라는 용어가 다소 생소하다면 집에서 직접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드는 ‘드립 커피’를 생각하면 되겠다. 드립 커피처럼 물이 조금씩 밭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점적 관개라고 한다. 점적 관개시설은 소형 물탱크, 튜브, 그리고 노즐로 구성되어 있다. 2~3m 높이에 위치한 물탱크에서 흘러나온 물이 밭에 골고루 퍼져 있는 튜브를 통해서 조금씩 밭에 공급되는 시설이다. 이 장치의 가격은 경작 면적에 따라서 다양한데, 폴락의 IDE는 튜브의 두께를 줄이는 방법 등을 통해서 20㎡의 밭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시설을 인도에서 3달러에 보급한 적이 있다. 2014년에 필자가 방문하였던 에티오피아 아다마 지역에 위치한 ‘LG 희망마을’에도 점적 관개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은 아열대 지역에 위치해 있어 우기와 건기가 매우 뚜렷하다. 점적 관개시설을 건기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건기에 농사지을 물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기에 대량의 물을 저장해 두는 것이다. 하지만 벽돌과 시멘트 등을 사용해서 이런 시설을 건축하는 데는 상당히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2006년에 IDE 인도 지부에서는 10m 길이의 이중벽으로 된 소시지 모양의 물 주머니를 흙을 파서 만든 웅덩이에 설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를 통해 IDE는 40달러만 사용해서 1만리터의 물을 보관할 수 있는 저장 탱크를 만들 수 있었다.
농산물 보관 및 가공 관련 적정기술
개발도상국에서는 옥수수 등의 곡물을 생산하여도 이를 장기간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식량이 곧 떨어져서 과거 한국의 춘궁기와 같이 기아에 허덕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 5월 ‘블루챌린저’ 사전 답사팀과 함께 방문한 베트남의 한 마을에서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한 옥수수가 썩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농산물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를 마련해서 이곳에 농산물을 보관한 뒤 산소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밀봉을 하면 된다. 2014년 초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을 방문하였을 때 그 곳 기술이전센터의 센터장이 운영하는 소규모 시설에서도 흙벽돌을 이용해서 곡식 저장시설을 만들고, 시멘트를 사용해서 봉하여서 6개월 동안 곡식을 보관하는 것을 목격했다.
농산물을 제대로 건조하지 못해 제값대로 팔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동남아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습도가 높기 때문에 태양열만을 사용해서 농산물을 제대로 건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낮 시간에 건조된 농산물이 밤에는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을 흡수하여 원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김만갑 캄보디아 과학기술국립대 교수는 5, 6년 전에 몽골에 있을 때 몽골의 전통 주거 형태인 게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지세이버’라는 축열기를 개발했다. 2011년에 캄보디아로 건너온 김교수는 지세이버 개발 시에 얻은 열 지식을 바탕으로 프놈펜 인근에 간이 소각로를 20기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필자와 함께 진행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여기서 얻은 연소 관련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 난방시설인 온돌을 활용한 농산물 건조시설을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은 거의 최적화된 건조장 설계에 도달했다. 온돌형 건조장을 사용해서 모링가, 파파야, 고야 등 다양한 농산물을 위생적으로 건조할 수 있다.
농기구 적정기술
2014년 초에 방문한 에티오피아 멜케사 지역에는 ‘멜케사 농업기술센터’가 있다. 이곳에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하였던 쟁기, 호미, 가래, 삼지창 등 다양한 농기구가 전시돼 있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였던 많은 농기구들이 사실은 적정기술 제품이었던 것이다.
지난 3월 연세대에서 적정기술미래포럼 주최로 개최된 ‘제9회 적정기술 아카데미’에 참가한 부산 출신 학생으로부터 다소 의외의 정보를 접했다. 이제 한국에서는 트랙터와 컴바인 등의 거대한 농기계를 사용해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농기구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시골에는 청년들이 도시로 떠난 경우가 많고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남으셔서 농사를 소규모로 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은 힘을 들여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농기구 개발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한국 시골에서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보다 효율적인 농기구를 개발해 국내에서도 사용하고 개발도상국에도 보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난해 개봉한 미국영화 ‘인터스텔라’의 배경은 농업 혁신이 실패해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미래의 어느 도시다. 인간은 결국은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 적은 비용을 들여서 효율적으로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적정기술의 개발은 우리가 끝까지 놓을 수 없는 화두다.
홍성욱·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