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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일관계, 상상력의 빈곤

입력
2015.08.0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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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아베 일본 총리가 전후 70주년 담화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통절한 사죄’를 담는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그는 지난 침략 전쟁을 “역사가의 판단에 맡길 일”이라거나, ‘A급 전범’을 “전쟁이 끝난 뒤 만들어진 개념”으로 “국제법상 사후법에 따른 재판은 무효라는 주장도 있다”고 말해온 사람이다. 일본을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겠다며 헌법 해석을 바꿨고, 결국 헌법까지 수정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되돌려 놓으려는 정치인이다. 담화의 최종 결과물이 무엇이든 거기에 진심이 담겼고, 그것대로 양국 관계가 새로워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관계는 전문가들의 숱한 지적을 따라 외교와 안보ㆍ경제를 분리해 접근하는 실용주의를 취한다 하더라도 개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내셔널리즘(또는 애국주의)에 기반한 아베 정권의 행보는 부상하는 중국, 돌발변수 북한과 함께 동아시아 지역 정세의 심각한 불안정 요소가 될 수 있다. 미국이 ‘해결사’가 될까. 중국과 협력을 추구하면서 견제도 하려는 미국이 아베의 일본을 든든한 원군으로 생각하는 한 쉽지 않다. 한국이 ‘조정자’가 될 수 있을까. 아베가 하듯 “애국”“애국”하고 있어서는 역시 부지하세월이다.

내셔널리즘이 그것을 믿는 사람을 얼마나 자가당착으로 만드는지는 ‘아름다운 나라로’라는 책에서 아베가 잘 보여준다. 그는 책에서 내셔널리즘이 소중하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2002년 북한에서 24년 만에 돌아온 일본인 피랍자의 기자회견 발언을 상기시켰다. “지금 저는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산, 강, 계곡 모든 것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저에게 속삭입니다. “다녀오셨어요, 애쓰셨어요.” 그래서 저도 기쁜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고마워요” 라고 기운차게 말합니다.” 아베는 이 말이 “솔직하고 힘있게 전해준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자기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나라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지금 한일관계에서 필요한 건 두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고 양국 관계의 미래를 밝히기도 어려운 ‘애국주의’의 낡은 틀을 걷어치우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상상력이다. 지도자들에게 기댈 게 없다면 시민이 나서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런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아베 정권 이후 일본에서는 시민들의 반전평화ㆍ탈핵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수천의 시민들이 총리 관저를 에워쌌고, 근대화 이후 일본 민권운동의 상징인 도쿄 히비야공원에 수만 명이 모여 “전쟁 반대” “헌법 수호”를 외치고 있다. 반전평화, 탈핵은 한국에서도 짧은 기간 시민운동의 중요한 의제로 자리잡았다.

한일관계가 꼬일 대로 꼬였어도 양국 시민사회 교류가 이에 크게 영향 받지 않는 점도 희망적이다. 한국일보가 후원하는 ‘피스&그린보트’ 행사를 주관하는 일본 피스보트의 요시오카 다쓰야 공동대표는 인터뷰에서 지난 10년 간 “한일 시민 연대의 가능성이 커졌고 점차 그 성과도 나오고 있다”며 양국 정부가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시민단체끼리는 신뢰를 쌓고 활동 범위도 더욱 넓혔다고 말했다. 지난달 일본의 한 학술회의에서 만난 한일 문제 전문가들도 양국이 시민 차원에서는 “교류의 횟수뿐만 아니라 관계 자체가 깊어지고 있다” “한일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근대화의 위험은 국민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전지구적 차원의 위험”이라고 한 울리히 벡을 떠올린다. 전후 70년을 맞고도 두 나라는 여전히 역사문제 등을 놓고 구조적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 한일 시민사회가 ‘반전’ ‘탈핵’을 구호로 삼는 ‘코스모폴리탄’적인 문제 해결 방식으로 양국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건 어떨까. 그건 단지 상상이나 희망이 아니라 벡의 말처럼 “충분히 현실적인 구상”이지 않을까.

김범수 여론독자부장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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