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이와타 사토루 Iwata Satoru

도쿄공대 출신 '닌텐도 구원투수' "게임은 단순하고 쉬어야"

두뇌트레이닝으로 노인층 포섭, 건강 겨냥 Wii 주부·직장인 열광

5년 못 넘긴 전성기… 스마트폰 게임 등장에 치명타

SNS 게임사와 제휴 수모도… 지난달 게이머들 추모 속 영면

1959.12.6 ~ 2015.7.11 한시절 비디오게임 마니아들에게 닌텐도의 이와타 사토루는 게임업체 사장이기 이전에 심정적 동지이자 롤모델이었다. 물론 사토루의 닌텐도가 그 마니아들의 게임 취향을 늘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실망하면서도 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그의 어떤 팬들은 중간에 게임기를 압수당했던 어린 날의 심정으로 그를 애도했다. AP뉴스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사가 야심작 ‘닌텐도 DS’와 ‘Wii’로 세계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하던 2000년대 중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게이머들 사이에선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소니는 게임기가 아닌 걸 게이머들에게 팔려 하고, 닌텐도는 게이머가 아닌 이들에게 게임기를 팔려고 한다.” 소니의 고가 고사양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PS3)에 대한 실망과, 게임에 아무 관심 없는 이들- 심지어 게임 좀 그만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부모들까지-을 고객층으로 포섭하려던 닌텐도 게임기에 대한 찬사였다.

그 무렵 닌텐도 게임왕국을 이끌던 젊은 사장 이와타 사토루(岩田聰)는 집에서 학교에서 ‘핍박 받던’게이머들에게 감동으로 사무칠 말 한 마디를 남긴다. “내 명함에 적힌 직함은 사장이지만, 머릿속에서 나는 게임 개발자이다. 하지만 마음으론 언제나 게이머다.”(2005년 게임개발자 컨퍼런스 강연에서)

그래픽보다는 아이디어, 하드웨어보다는 게임 자체의 재미로, 다시 말해 게임의 ‘본질’로 승부하려던 닌텐도의 저 전략은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무 순진했고 낭만적이었다. 고화질 영화를 방불케 하는 그래픽과 블록버스터 컴퓨터 네트워크 게임들의 등장으로, 무엇보다 더 값싸고 더 단순하고 더 손쉽고 중독적인 게임들이 널려 있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닌텐도의 저 영화는 채 5년을 넘기지 못했다.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추격으로 매출은 급락했다. 고전적 비디오게임 인구 자체가 감소했다.

그 와중에 ‘닌텐도 최고의 게이머’ 이와타 사토루가 7월 11일 자신이 게임을 중단했다.“게임기를 팔아 돈을 벌고 경쟁 업체를 물리치는 것보다, 비디오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일한다”던 그를 주저앉힌 것은 아이폰 앱스토어가 아니라 지병인 담관암이었다. 향년 57세.

한국일보 자료사진.

닌텐도는 수공예 장인 야마우치 후사지로가 1889년 창업한 회사다. 당시 이름은 ‘닌텐도 곳파이’, 일본 전통 화투 ‘하나후다’를 손으로 그려 만들던 1인 기업이었다. 회사는 인기로 몸집을 불려갔고, 1953년 무렵에는 플라스틱 화투를 대량생산하는 회사가 됐다. 창업주 후사지로의 증손자 야마우치 히로시가 3대 회장에 갓 취임한 때였다. 히로시는 월트 디즈니와 계약을 맺고 59년 디즈니 캐릭터 카드를 출시해 회사 매출을 크게 신장시켰고, 62년 닌텐도를 오사카 증권거래소에 상장한다. 주식 공개 이후 히로시는 운수 식품 숙박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가 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일본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호된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오락산업 한 우물만 파라”는 그의 경영 지침은 저 뼈아픈 실패의 경험에서 나온 거였다.

히로시의 닌텐도가 재기의 돌파구를 연 것은, 이제는 추억의 완구가 된 1966년의 ‘울트라 핸드(요코이 군페이 작품)’를 통해서였다. 지그재그로 엮인 플라스틱 막대기를 가위처럼 생긴 손잡이로 접었다 폈다 하면서 끄트머리 집게발로 물건을 집을 수 있도록 고안된 ‘울트라 핸드’는 불티나게 팔렸고, 잠망경버전인 ‘울트라 스코프’ 야구 피칭오락기 ‘울트라 머신’ 등으로 응용되기도 했다. 훗날 울트라 핸드는, 닌텐도의 히트 게임 슈퍼 마리오의 ‘파워 테니스’ Wii의 ‘울트라 핸드’등 게임 소프트웨어에도 등장하게 된다.

닌텐도가 전자오락 시장에 진입한 것은 1974년 오일쇼크 직후였다. 유가 상승으로 완구원료비가 치솟고 판매는 부진하던 시점이었고, 미국의 선구적 게임업체 아타리 사의 TV게임 ‘Pong’이 큰 인기를 끌던 무렵이기도 했다.

1977년 닌텐도는 첫 가정용 게임기 ‘컬러TV게임 15’를 출시한다. 막대기 두 개로 공을 주고 받는 테니스, 블록 깨기 등 후속 버전을 잇달아 출시하면서 ‘닌텐도= 전자오락’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80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 워치’를 만든 것도, 게임 카트리지를 교환해가며 하나의 게임기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한 ‘패밀리컴퓨터’(줄여서 ‘패미컴’, 83년)를 처음 만든 것도 닌텐도였다. 패미컴의 인기는 85년 첫 선을 보인 패미컴용 게임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와 잇달아 등장한 ‘제비우스’ ‘로드러너’ 등과 함께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95년 3D 입체 영상을 구현한 95년의 ‘버추어 보이’와 슈퍼패미컴 후속 기종으로 96년 출시한 ‘닌텐도 64’로 닌텐도는 참담한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94년 시장에 진출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은 급속히 시장을 잠식했고, 유력 게임 개발사들도 거대 전자기업 소니의 의욕적인 게임산업 투자에 빨려 들어갔다. 소니는 롬팩을 고집하던 닌텐도와 달리 단가나 용량 면에서 훨씬 유리한 CD 베이스로 전환한 상태였다. 닌텐도는 플레이스테이션2의 대항마로 출시한 게임큐브에서 롬팩 대신 DVD기초의 광학디스크를 채용, 용량과 로딩 속도를 개선했지만 소니 열풍과 MS의 ‘엑스박스’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토루가 닌텐도 4대 사장에 취임한 게 2002년, 90년대 중반 이래의 힘겨운 싸움으로 닌텐도가 기진맥진해 있던 때였다. 사토루는 승부사 히로시가 120년 세습경영의 전통을 깨고 꺼내 든 조커였다.

둘의 인연은 1980년대 사토루의 ‘HAL 연구소’ 연구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직원 5명의 이름 없는 벤처 회사 직원이던 20대 게임 개발자가 세계 최강 기업 경영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명문 도쿄 공대를 나와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마다하고 영세 벤처회사에 취직한, 컴퓨터와 게임에 미친 한 청년의 실력과 겁 없는 열정이 닌텐도 제국의 늙은 기업인에게 신선했을지 모른다. 당시로선 성장일로에 있던 휴대용ㆍ콘솔 게임기 시장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게임기 못지않게 새로운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이 절실하던 때였다. 1인 기업의 전통 위에 선 보수적 회사답게 ‘서드 파티(Third Partyㆍ사외 협력사) 관리에 유난히 까다롭던 닌텐도 경영진이 80년대 중반 ‘HAL 연구소’를 협력 파트너로 인정하고, 프로그램 자문과 게임 외주 제작까지 의뢰하게 된 데는 사토루의 공이 컸다고 한다. 오락실용 게임이던 ‘벌룬 파이터(Balloon Figiter)’를 패미컴용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닌텐도 개발진의 버전보다 사토루 버전이 훨씬 뛰어났다는 일화도 있다.

닌텐도가 HAL연구소를 인수한 건 92년이었다. 히로시는 사토루에게 연구소 운영 전권을 맡기고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에 전념케 한 데 이어 2000년에는 본사 경영기획실장을 맡겼고, 2년 뒤 자신의 자리를 넘겼다.

2004년 CEO 2년차의 사토루는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 DS’로 소니의 ‘PSP’를 거의 박살내다시피 한다. 강력한 스펙과 멀티미디어 기능의 PSP와 달리, 터치펜에 전자수첩처럼 생긴 닌텐도 DS의 킬러 컨텐츠 중에는 간단한 연산과 단어 게임 등 ‘두뇌 트레이닝’ 시리즈도 있었다. 노인 치매 예방효과가 알려지면서 ‘전자오락’과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노인들의 소비 시장(자녀들의 선물용 소비)도 열렸다. 닌텐도 DS는 무려 1억 5,000여 만 개가 팔렸다. 당시 한국의 10대들 사이에서는 ‘닌따(닌텐도 없으면 왕따)’라는 말이 유행했다.

사토루의 닌텐도가 가정용 오락기로 내놓은 게 2006년의 ‘Wii’였다. ‘위모컨’이라 불리는 모션센서를 내장한 무선 컨트롤러로 TV 모니터 앞에서 테니스도 치고 복싱도 할 수 있는 체험형 오락기였다. 공을 때리면 진동도 느껴지고 스피커에서 효과음도 났다. 닌텐도 DS가 노령화사회의 정신건강을 겨냥했다면 Wii는 모니터 앞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현대인의 건강-피트니스를 겨냥한 거였다. Wii에 먼저 열광한 것은 주부와 직장인들이었다. 2006년 11월 워싱턴포스터의 한 기자는 Wii와 소니의 대응모델 ‘PS3’를 구비해두고 친구 8명을 초대해 두 제품에 대한 반응을 비교했다. 그는 “600달러짜리 소니 시스템을 테스트하기 위해 4,500달러짜리 50인치 파이어니어 플라스마TV 세트를 구비한 반면, 250달러짜리 닌텐도 Wii를 위해서는 플라스마TV 화면의 절반 크기인 오래된 브라운관 TV를 설치했다.”하지만 결과는 닌텐도의 압승이었다. 기자는 심지어 비디오게임을 싫어하던 한 친구도 “내가 얼마나 게임을 좋아하는지 알게 돼 놀랍다”고 말했다고 썼다.(2006. 11.24)

경쟁사들이 화려하고 리얼한 그래픽과 복잡한 기능으로 첨단 게임을 지향할 때 사토루는‘단순하고 쉬운 게임’을 지향했다. 그 이유도 단순했다. 게임 프로그램이 고도화할수록 새로운 게이머에겐 기술적 진입 장벽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기존 게이머들로서도 더 새롭고 복잡한 게임을 추구하게 돼 기존 프로그램에 금방 싫증을 낼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컴퓨터 게임이 골방에서 (잠재적)문제아들이나 즐기는 저급한 ‘오타쿠 문화’가 아니라 가족이 거실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다들 니치마켓을 말하는데,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경쟁사들처럼 하이테크에 심취한 코어 게이머들을 겨냥하게 되면 결코 게임 인구를 확장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의 게임층 그 너머를 겨냥하고 있다.”(시애틀포스트, 07.3.3) 그는 ‘틈새’가 아니라 ‘신대륙’을 노렸다. 그 지향은 소니나 MS가 컴퓨터와 가전제품에서 시작해 게임으로 진입한 것과 달리 닌텐도가 화투와 완구에서 시작해 아케이드게임으로 확장해나간 경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닌텐도 게임의 ‘유치한’ 이미지에 대해, 실제로 유ㆍ청소년 지지층이 더 많은 닌텐도의 현실에 대해, 사토루는 자랑스러워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재미난 게임을 선택하기 때문”이었다.(시애틀포스트) “기술이 중요하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점점 고도의 구동프로세서 칩을 적용하고 기술과 첨단 IT장비에 초점을 맞춰 게임 개발에 나선다면, 소비자들은 점점 더 많은 전력을 소비하게 되고 점점 더 비싼 게임을 하게 될 것이다.” 얻는 것과 잃는 것 사이의 균형 위에서 닌텐도 게임은 진화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2006년 4월이래 1년 사이 닌텐도 매출은 전년비 90%가 늘었고, 영업이익은 2,5배, 순이익은 77% 증가했다. 2007년 6월 26일 게임기 단일업종의 닌텐도는 일본 전자산업의 상징인 소니를 제치고 일본 주식시장에서 장중 한 때 시가총액 2위(1위 캐논)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닌텐도 직원 1,401명의 1인당 매출은 52억 원이었고, 전세계 19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소니의 직원 1인당 매출은 3억여 원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과천청사를 방문해 ‘현장비상경제대책회의’라는 걸 주재하면서 “왜 우리는 닌텐도 게임기 같은 걸 못 만드느냐”고 질타했던 건 2009년 2월이었다.

하지만 사토루가 저 말을 들었다면 쓴웃음을 지었을지 모른다. 그 무렵 그의 닌텐도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도전, 즉 애플의 스마트폰과 모바일 혁명에 당혹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도의 게임기도 필요 없고, 대부분 공짜에다 단돈 몇 달러만 지급하면 전세계의 신예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새로운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거였다. 엔화 강세도 닌텐도로선 치명적이었다. 2011년 닌텐도는 81년 이래 30년 만에 첫 적자를 기록했고, 잇달아 출시한 ‘닌텐도3DS’와 ‘Wii ?유’도 죽을 쑨다.

지난 해 3월 사토루가 소셜네트워크 게임업체인 DeNA와 자본제휴를 선언했을 때, 닌텐도의 오랜 팬들 중에는, 사정을 알면서도 배신감에 가까운 상실감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독자적인 게임기 시장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해 6월 담관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에도 2016년 출시할 신개념 게임기 ‘NX’ 개발 작업을 진두지휘 했다고 한다.

와카키 타미키의 만화 ‘신만이 아는 세계’의 고교생 주인공 카츠라기는 “완벽하고 논리적이고 아름다운”게임의 세계에 빠져 “(부조리한) 현실 같은 건 쓰레기”로 아는 천재 게이머다. 그는 인터넷에선 미소녀 공략 게임의 신으로 통하지만, 현실에선 ‘오타쿠’ 외톨이다. “미소녀 게임의 역사…. 그것은 3D와 2D의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입체감 없는 2D 캐릭터가 현실의 3D를 당해낼 리 없다.” 하지만 카츠라기는 2D의 가능성을 믿었다. “모자라는 D는 ‘Dream’으로 초월할 수 있어!”만화 속 그는 자신의 꿈으로 세상의 텅 빈 영혼들을 구원한다.

1959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에서 태어난 사토루도 게임 광이었다. 커서는 천재 게임 프로그래머가 됐고, 마침내 세계 최강 게임 제국을 이끈 CEO가 됐다. 그 역시 꿈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는 닌텐도 게임의 성근 영상을 기술적 결핍이 아니라 상상력의 여백이라 여겼거나 우겼다. 하지만 (부조리한) 현실은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적어도 닌텐도와 사토루의 오랜 팬들은 그리 여길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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