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연구의 1인자, 재야사학자 故 신기수 선생 작품
조선사절단 통한 국교 회복, 한일관계의 모델로 다시 조명

5일 오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홋카이도로 향하는 뱃길 위에서는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한 편의 의미 있는 영화가 상영됐다. 바로 조선통신사 연구의 1인자인 재일동포 재야사학자 고(故) 신기수 선생이 1979년 만든 작품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다. 이날 특별상영회는 선상에 있는 한일 시민 3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간 12차례 일본 에도 막부를 방문했던 외교문화사절단이다. 조선통신사 파견은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이 전쟁이 끝난 지 9년 만에 국교회복에 합의한 데 따른 조치이다. 평균 400~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던 조선통신사는 5~8개월에 걸쳐 쓰시마섬을 거쳐 오사카, 교토와 에도(현 도쿄)에까지 갔다.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은 가는 곳마다 문화교류의 붐을 일으켰다. 지나가는 행렬 사이로 끼어 들어가 휘호를 부탁한 일본인이 많았고, 조선통신사 일행이 탄 배를 쫓아가면서 보다가 일본 사람의 배가 전복된 사고도 있다. 일본 민중 사이에선 조선통신사 모습을 새긴 칼이나 장식품도 유행했다. 신 선생의 딸 신이화(50)씨는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판화를 보면 에도시대 도쿄 요시와라 지역 기생들이 조선통신사 패션을 따라 하는 유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조선통신사 복장을 하고 교차로에서 나팔을 부는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상영회 직후 가진 좌담회에 참석한 작가 이시카와 요시미씨는 “지금으로 치면 일본 사람이 배우 욘사마(배용준)를 보고 열성팬이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비유했다.
영화는 조선통신사의 이 같은 역사적 의의와 화려했던 한일 문화교류 사료를 최초로 조명한 역사 다큐멘터리로 신 선생이 사재를 털어 제작했다. 그가 조선통신사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고서 시장에서 두루마리 그림 하나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로부터 3년 후 교토 니죠성 창고에 수장돼 있다가 1911년 일반인 손으로 넘어간 길이 120m짜리 두루마리 그림이 발견되자 영화화 작업을 결심하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추가로 발견된 120m짜리 두루마리 그림이다. 1711년 제8회 통신사 일행과 안내 역할을 맡은 사무라이 등을 포함해 4,800여명을 소재로 일본 화가 43명이 함께 그린 것이다. 일행의 생생한 모습과 표정을 담은 두루마리는 당시의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신 선생은 두루마리 그림을 씨줄로 하고 직접 일본 각지에서 발굴한 그림과 축제를 날줄 삼아 조선통신사를 영화로 복원했다.
당시 조선통신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 영화는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2위를 차지했고 문부성 선정 영화가 됐다. 이를 계기로 일본 교과서에 조선통신사가 실리기도 했다. 또 영화가 나온 이듬해인 1980년부터 쓰시마섬에서는 170년 만에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36년 전 만들어진 이 영화는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한일 관계 회복에 있어 성공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일 한국인 1세의 신산한 삶을 담은 영화 ‘해방의 날까지’를 제작한 신 선생이 이 영화를 만든 것도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서도 배울 수 있지만 성공한 역사에서도 배우자는 취지였다.
한국어판 프로듀서인 신이화씨도 선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지난해 한국어 자막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상영 활동을 펴고 있다. 그의 노력으로 올해 3~5월 부산, 6월 도쿄, 제주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각각 상영회가 열렸다. 신씨는 이날 인사말에서 “한일 시민 여러분과 함께 한국도, 일본도 아닌 바다 위에서 아버지의 영화를 상영하게 돼 더욱 특별한 감회가 든다”고 말했다.
한편 영화 좌담회에 참석한 와카미아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은 영화 내용과 별개로 조선통신사를 둘러싼 뒷얘기를 들려줘 청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에 따르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으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국교회복을 요청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9년 만에 화친을 요청한 것은 조선출병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때 왕의 무덤을 파헤친 범인을 넘겨줄 것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침략을 사과하는 국서를 먼저 보내라는 까다로운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연락책 역할을 했던 쓰시마섬 번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국서를 보낼 리 없다고 판단하고, 아예 국서를 위조해버렸다. 국서를 받은 조선은 내용이 수상쩍다고 여겼으나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고 위조 사실을 못 본 척 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조선이 위조된 국서에 대한 답장을 보낸 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 희대의 국서위조 사건이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쓰시마섬 번주는 아예 조선의 국서를 중간에 가로채 전달하지 않았다. 이런 내용은 30년 뒤 내부 고발자가 밀고를 하면서 도쿠가와 막부에 알려졌으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교류를 계속하기 위해 사건을 덮었다. 와카미아 전 주필은 “지금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겠지만 답답한 요즘 한일 관계를 보면 예전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션드림호(블라디보스토크)=김영화기자 yaaho@hankookilbo.com
●신기수는 누구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신기수(1931~2002) 선생은 고베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한 후 조선통신사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재야사학자다. 관련 자료 110점과 민화 병풍 33점으로 이뤄진 ‘신기수 콜렉션’은 현재 오사카시립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 외에도 그는 1986년 ‘해방의 그날까지: 재일조선인의 발자취’라는 기록영화를 찍었다. 이밖에 ‘대계(大系) 조선통신사’ 8권 등 20여권의 저서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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