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때가 69세라고 한다. 사회가 부여한 의무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시기라서 그렇다고 한다. 파리의 65세에 한 초등학교 수위로 정년을 맞이하게 된 토마 페루아도 인생 황금기를 눈앞에 두고 가슴이 벅찰 만도 했다. 그러나 정년 퇴임 직전 그의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워졌다. 20년 동안 임대로 살아온 아파트의 새 주인이 퇴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낮은 가격에 주변에서 아파트를 구하기는 어려운데 조부모 시절부터 살아온 동네를 떠날 생각이 아예 없다. 좌파는 언제나 곤경에 처한 약자를 돕는다는 믿음으로 살아온 페루아는 인생 종반기 삶의 시험대에 오른다.
페루아의 곤경을 알아챈 학부모회장이 서명운동에 나섰다. 학부모 500명 가운데 450명이 서명했고 33명이 페루아가 새 임대 주택을 얻도록 구청장에게 청원서를 냈다. 구청은 집을 알아보는 동시에 페루아 거주 집의 새 주인에게 퇴거 기한을 연장해달라 했다. 생활에 자리잡은 연대감이 페루아를 곤경에서 구해낸 셈이다.
혁명과 변혁 등 거창한 구호만 앞세운다고 다 좌파를 아닐 것이다. 그저 일상에서 약자를 위해, 타자를 위해 나눔을 실천하고 지속 가능한 변화를 꾀한다면 정당에 소속돼 있지도 않고 특정 좌파 이념을 꿰고 있지도 않아도 좌파로 지칭될 수 있다. 젊은 혈기로 이데올로기에 빠졌다가 나이가 들어 ‘먹고사니즘’을 내세우며 변절을 합리화하는 ‘왕년의 좌파’보다, 교양을 드러내는 액세서리처럼 이념을 활용하는 강남좌파보다 더 건전한 좌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책은 프랑스 파리에서 조용히 은근하게 실질적 좌파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하며 한국에서의, 생활 속 좌파의 실현가능성을 반문한다.
저자가 만난 파리의 좌파 15명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파벌끼리의 악다구니 속에 한반도 남쪽의 좌파가 공멸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꽤 큰 울림을 지녔다. 교조주의에 머물지 않고 생각을 넓히고 실천하는 것도 좌파의 진정한 면모다. 책은 교회 종탑에 올라 십자가를 잘라내고 이슬람 국가의 법원 앞에서 반라 시위를 벌이는 여성 폴리 일리의 활동을 소개하며 좌파의 새로운 좌표를 소개하기도 한다. 일리는 섹스산업과 독재, 종교가 가부장주의에서 비롯된 3대 악이라는 생각에 앞에 열거된 활동 등에 나섰다.
저자는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연구원으로 4년 동안 활동했다. 파리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고 진보 정당에도 적을 두었던 저자의 시선만으로도 책은 일독의 가치를 지닌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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