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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고통에 응답하는… 우리 철학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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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고통에 응답하는… 우리 철학을 합시다"

입력
2015.08.0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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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철학자 김상봉과 기자 고명섭 대담

'나'만 있는 서양적 주체성은 병든 나르시즘

공동체가 핵심인 '서로주체성' 제시

국가폭력·학벌 사회 등에 대안 모색

만남의 철학 / 김상봉 고명섭 지음 / 도서출판 길 발행ㆍ716쪽ㆍ3만5,000원
만남의 철학 / 김상봉 고명섭 지음 / 도서출판 길 발행ㆍ716쪽ㆍ3만5,000원

지적 희열을 남기는 대화들이 있다. 공중누각만 쌓다 소란하게 부서지는 말들과 달리 곱씹어 생각할수록 무릎을 치고 환희에 젖게 되는 이야기. 말이 모자랄 새 없는 시대지만, 언사가 차고 넘칠수록 이런 그윽한 대화의 기쁨이 줄어드는 역설은 자주 우리를 지치게 한다.

‘만남의 철학’(도서출판 길)은 묵직한 사유와 상호 존중에 기반한 철학적 대화가 끌어내는 지적 희열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대담집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더 오래 이름을 알린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철학서 저자이며 시인이자 기자인 고명섭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이 마주 앉았다. 2013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세 차례 40여 시간에 걸쳐 진행된 대담을 총 3부로 풀어냈고, 머리말과 서론을 하나씩 맡아 쓰며 긴 대화의 성격과 가치를 정의했다.

화두로 삼은 것은 김상봉 철학, 넓게는 철학 그 자체다. 책은 김 교수가 서양의 주체성(홀로주체성)의 대립항으로 내놓은 ‘서로주체성’의 “숲”을 그리기 위해 그 씨앗, 뿌리, 밑동, 줄기 등을 차근차근 되짚는다. ‘서로주체성 3부작’ 혹은 ‘김상봉 철학의 3부작’으로 통하는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나르시스의 꿈’,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대한 논의가 큰 골자를 이룬다.

서양의 철학, 특히 칸트의 존재론은 공동체에 대한 염두 없이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의 주인인 ‘나’를 중시한다. 김 교수는 이를 ‘홀로주체성’이라 부른다. 이는 서양 존재론과 철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 교수는 타인과 만나 우리를 이룸으로써만 생겨나는 새로운 주체성 즉 ‘서로주체성’의 개념을 제시했다. 또 이를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타인의 고통에 응답해 나를 바친” 한국의 민중항쟁의 가치를 조명해왔다.

그에게 “너를 사랑할 줄도 모르며 너로 인해 나를 상실할 줄도 모르는 서양적 자기의식은 병든 나르시시즘”이며, 비판적 의식 없이 이를 수입해 우리말로 알리는 데만 몰두해온 한국의 강단 철학은 “남의 땅에서 꺾어와 제 방의 꽃병에 꽂아놓은 꽃처럼 죽은 철학”이다.

두 사람은 2013년 7월 첫 대담을 위해 제주 모슬포항에 위치한 김 교수의 골방에 마주 앉았다. 한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농가주택에서 시작된 대담은 16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도서출판 길 제공.
두 사람은 2013년 7월 첫 대담을 위해 제주 모슬포항에 위치한 김 교수의 골방에 마주 앉았다. 한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농가주택에서 시작된 대담은 16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도서출판 길 제공.

‘주체’를 주제로 한 책의 1부는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 신학자 윤성범 교수와의 만남, 유학시절 등 김 교수의 의 지적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서양 철학 속에서 홀로주체의 개념이 만들어지는 흐름과 이를 한국 지성이 이해해온 방식을 차분하지만 집요하게 되짚는다. 2부에서는 ‘만남’을 주제로 3부에서는 ‘공동체’를 주제로 철학의 실천과 국가폭력, 지역 차별, 노동자와 경영권, 총수자본주의, 학벌사회 등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

고 위원이 “주체가 만남에 대해 갖는 동경은 어떻게 나타나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김교수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은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을 때 나타난다”고 설명하는 가운데 논의의 외연이 확장되는 식이다.

완성된 대담 기록을 김 교수가 “새 글을 쓰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복원하고 다듬고 때로는 재구성”한 까닭에 글이 입말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나, 묻는 이와 답하는 이 모두 문학적이되 젠체하지 않는 선명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이 책의 여러 미덕 중 하나다.

고 위원은 서론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대담 전 플라톤의 ‘국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치열하게 논전을 펼치는 트라시마코스를 모델로 삼았지만, 교양 부족으로 이야기를 경청하고 추임새를 넣는 클라우콘에 가까웠다”고 적었다. 하지만 이는 겸양일 뿐 그는 치열한 탐독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날 선 질문자, 논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회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 덕에 김 교수의 어느 저작에서도 제기된 적 없는 새 담론들도 곳곳에 녹았다. 서양음악에서 발견되는 홀로주체성, 그리스 정신과 기독교의 관계, ‘존재’의 번역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둘은 이 노작을 빚은 공로자로 서로를 지목한다. “대담은 오로지 고명섭의 인간적 성실함과 철저한 준비 덕에 가능했다”(김 교수) “김상봉 철학의 깊이를 들여다봄으로써 아찔한 희열을 느꼈다.”(고 위원)

두 대담자가 치열한 대화를 통해 시종일관 지향하는 것은 “지적 셋방살이를 끝내”고 우리의 철학을 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본주의의 한계 등 새로이 주어진 과제 앞에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생성되는 공동체”의 새 가능성을 엿보는 일이다. 현실의 어둠은 문제될 게 없다.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정신의 본질”이며 “슬픔이야 말로 철학의 자리”라는 게 바로 김상봉 철학의 본령 아닌가.

대담을 마무리한 김 교수는 이렇게 희망했다. “비길 데 없는 우정에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제 이 많은 생각의 씨앗들을 흐르는 물 위에 뿌린다. 오래 갇혀 있던 생각들이여. 흘러가라. 새로운 땅을 찾아서.”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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