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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중심의 서양철학, 감정을 얘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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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중심의 서양철학, 감정을 얘기하다

입력
2015.08.0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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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격동 / 마사 누스바움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 발행, 전 3권, 총 1352쪽
감정의 격동 / 마사 누스바움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 발행, 전 3권, 총 1352쪽

가난, 파트너의 부정(不貞),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재난, 질병, 무심한 부모, 배은망덕한 자식들, 당혹스런 사건의 돌발, 피곤, 악평, 휴가를 망치는 것, 지루함, 짜증나는 일….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68)이 ‘감정의 격동’ 2부 ‘연민’편에 열거한 ‘골칫거리’ 들이다. 이런 일들이 사소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이것들이 행복을 결정하기에. 그럼에도 학술 세계에 제대로 상정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이것들은 주로 감정에 맡겨진 것인데 감정은 이성적 판단 능력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취급되었기에. 아닌게 아니라 서양철학은 감정을 푸대접해왔다. 언제나 핵심은 이성이 차지했고, 감정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저 ‘골칫거리’들이 작은 문제가 아니고, 이것들을 떠맡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인데도 말이다. 그의 주장은 단호하다. “감정은 도덕철학적 주제의 도드라진 부분을 이루어야” 한다. “감정은 우리의 정신적-사회적 삶의 풍경을 형성”하며 “나 자신의 안녕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외적인(즉 통제 불가능한) 것과 관련해 현재의 사태를 등록하는 나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의 감정 철학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에게 중요한 것”에 대한 가늠과 가치 판단을 수행하는 것이 감정이다. 그러나 감정은 홀로 있지 않고 ‘연민’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너’와 ‘우리’로 확장하며, 그 바탕에는 우주사적 원리인 사랑이 작용한다. 그 증인으로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아우구스티누스, 스피노자, 루소,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불러낸다. 단테, 에밀리 브론테, 휘트먼, 제임스 조이스, 프루스트의 문학 작품과 말러의 교향곡도 분석의 무대 위로 초청한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자신의 체험을 사유와 실천의 대상으로 끌어올리는 대목이다. 여러 철학자들과 일전을 벌이고, 문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의 시선을 던지는 광경보다 자신의 안쓰러운 감정에 말을 거는 장면이 훨씬 인상적이다. 이런 모습은 ‘실천’을 강조했던 고대 스토아철학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죽음과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상대화하는 연습을 스토아 학자들은 ‘meditatio(수련)’라고 불렀는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누스바움이 실천한 감정철학이 여기에 해당된다. 저자의 진정성이 담겼다는 점에서 ‘감정의 격동’은 좋은 책이다.

하지만 “2,500여년에 걸친 ‘감정 탐구’의 결정본”이라는 선전 문구는 지나친 감이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감정 일반에 대한 종합적 성찰로 씌어진 게 아니라 강연문을 묶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본’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학문은 왜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문명은 왜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졌는지, 그 후유증이 무엇이고 어떤 해결이 가능한지 등에 대한 답이 필요할 것이다.

두려움에 대한 논의가 빠진 것도 아쉽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연민의 짝패가 실은 두려움이다. 나도 불운과 불행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타자를 연민하게 만든다. 연민은 시혜적인 성격이 강한 감정인 데 비해 인간은 누구나 운명과 신 앞에 평등하며 약한 존재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감정이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로 연대시키고 결속시키는 더 근본적인 존재-조건이라 할 수 있다. 두려움의 관점에서 연민의 문제를 살폈다면, 혹은 연민의 관점에서 두려움의 문제를 저울질했다면 좀 더 종합적 고찰이 됐을 텐데, 누스바움은 ‘연민’에서 ‘사랑’으로 곧장 올라가버렸다.

삶의 골칫거리들이 일으키는 감정의 격동을 어떻게 정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감정을 정화하는 힘이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누스바움의 주장에는 십분 동의한다. 하지만 저 골칫거리들이 깔린 삶의 지뢰밭에서 머물러야 하는 현대인에게 단테의 ‘기독교적 사랑’이 유효한지는 의심스럽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감정이 감당해야 하는, 다시 말해 개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문제들은 사실 사회적으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들이다. 가난과 재난이 대표적이다. 누스바움은 이것들을 개인이 떠맡아야 하는 몫으로 보는 게 아닌지 싶다.

‘감정의 격동’은 감정 문제를 철학의 영역에 안착시킨 중요한 책이다. 하지만 이제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이성 중심인 서양철학 전통에 감정철학을 상정하는 일만으로도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 책에서 검토되지 않은 다른 물음들을 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뱀다리 하나를 덧붙이겠다. 누스바움이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론’ 논쟁을 읽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굳이 서양어법을 빌어서 말하자면, 퇴계와 율곡에게 ‘감정과 이성’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짝패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훨씬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안재원ㆍ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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