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찻퐁 태국 감독 '열병의 방' 연극·영화 섞은 실험작 선봬
"큰 예술극장, 질투날 만큼 부러워"
차이밍량 대만 감독 '당나라 승려' 빈페스티벌서 초연한 '행자' 시리즈
"유리벽 통해 외부와 연결된 느낌"
2000년 영화 ‘정오의 낯선 물체’로 데뷔한 태국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45)은 2004년 ‘열대병’으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2010년 ‘엉클분미’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거장 반열에 올랐다. 1957년 말레이시아 출생의 차이밍량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대표 감독으로 1994년 ‘애정만세’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2005년 ‘흔들리는 구름’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예술영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두 거장이 9월 광주를 찾는다. 영화가 아닌 연극을 들고서. 두 사람은 각각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중극장과 대극장 개관 공연을 연출한다. 개관을 한 달 앞둔 4일 예술극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장소, 옛 전남도청 자리에 지어진 극장을 보고 “질투가 날만큼 부럽다” “개막작을 연출하게 돼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극장이란 무엇인가.
아피찻퐁 “극장은 공유의 장소”
오전 11시. 기술팀과 회의를 끝낸 후 중극장에서 만난 아피찻퐁은 “개막작 ‘열병의 방’은 연극과 영화의 중간 성격의 공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무대점검 결과를 토대로 태국에서 이달 말까지 ‘열병의 방’ 영상작업을 끝낼 예정이다.
‘공연보다 영화가 좋다’고 공공연히 말해온 그가 이번 개막공연을 맡은 것은 다소 의외다. 아피찻퐁은 “몇 년간 연극 오페라 연출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했다”며 “김성희 예술감독이 태국에 있는 집까지 찾아와(그는 치앙마이 부근 정글에서 산다) 완연한 형식의 연극이 아니라도 좋다고 했다. 새로운 공연을 실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카메라를 통해 관객 시야를 제한하고 몇 번이든 다시 찍고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는 연극에 비해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아요. 이번에 두 장르를 섞어 새로운 공연을 선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한데 올 봄 실제로 예술극장에 와보고 덜컥 겁이 났단다. 그는 무대에서 빈 객석을 바라보며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생각했고, 이 아이디어를 작품에 반영했다.
‘열병의 방’은 영상과 관객 퍼포먼스가 결합된 70분짜리 ‘하이브리드 공연’이다. 객석 맨 앞에 놓이는 가로 세로 3.6×2m의 스크린 2대와, 무대 위 간이의자가 관객을 맞는다. 스크린에는 선사시대 유물창고, 일본제국주의시대 태국 저항운동 기지, 베트남 전쟁시절 병원으로 쓰인 동굴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좁은 입구를 통해 극장에 들어온 관객은 영상을 감상하고 자유롭게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새 극장을 알아간다는 컨셉트다. 그는 “저에게 동굴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간, 최초의 영화가 탄생한 공간”이라며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가진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회에 관한 비판적 시각과 현재 태국의 군부독재 현실도 작품에 녹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피찻퐁은 예술극장에 대해 “좋은 싫든 이 극장을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세계적으로 알려진다는 점에서, 역사를 극복하고 한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에게 극장은 관객과 뭔가를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규모의 예술극장이 개관한다는 건 질투가 날만큼 부러운 일이죠. 다음에도 공연 제안이 오면 연출을 맡고 싶습니다.”
차이밍량 “극장은 감각의 촉을 되살리는 곳”
“관객들은 무대 위에 올려진 것만 ‘공연’이라고 기억하고 극장을 ‘시설이 갖춰진 공연 장소’라고 생각하죠. 개관작은 이런 통념을 확 바꿔버릴 겁니다. 극장 자체가 주는 감동을 기억하게 말이죠.”
오후 2시 대극장 앞. 제작진 미팅 후 한껏 고무된 차이밍량이 신나서 개관작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당나라 승려’를,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광주극장에서 ‘차이밍량의 영화관’을, 5?18민주평화기념컨퍼런스홀에서 설치미술 ‘떠돌이개 in 광주’를 선보인다. 그의 말마따나 “신구(新舊) 극장의 특장점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는 셈이다. ‘당나라 승려’는 한국 벨기에 오스트리아 대만이 공동제작한 작품으로 지난해 오스트리아 빈페스티벌에서 초연했다.
“예술극장 대극장은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된 반(半)개방식이에요. 극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 볼 수 있고, 극장 안 관객들도 외부를 볼 수 있죠. 이런 구조에 대해 비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새 관념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반감이라 생각해요.”
사실 차이밍량은 극장에 관해 많은 말을 해왔다. 1994년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그는 직접 필름을 갖고 다니며 지방 대학 등지에서 순회상영을 했고, 수상 후에는 천박해진 영화산업과 영화관 배급시스템에 대해 주야장천 비판했으며, 2003년 대만의 낡고 오래된 복화극장을 주제로 한 영화 ‘안녕, 용문객잔’을 찍었다. 2011년 무렵부터는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영화를 미술관에서 상영하고 있다.
“영화관이든 전시장이든 공연장이든 저에게 극장은 ‘예민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입니다. 제 영화 ‘떠돌이 개’를 영화관이랑 미술관에서 상영했는데, 어디서 봤든 관객들은 이전에 신경 쓰지 않던 ‘인간의 움직임’에 주목했어요. 감각의 촉을 되살리는 거죠.”
‘당나라 승려’는 홍콩과 타이베이 등 도시에서 빡빡 깎은 머리의 강렬한 빨간색 옷을 입은 행자(스님을 연상시키는)의 초저속 걸음을 영상화한 ‘행자’ 시리즈 중 하나다. 차이밍량은 “1000년 전 인도로 불교경전을 찾아 수천 마일을 걸어간 현장법사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행자로 출연하는) 이강생이 1시간 동안 긴 잠을 자고 일어나 흰 종이 위를 1시간 반 동안 걷죠. 또 대만 미술가 카오 쥔홍이 출연합니다. ‘흰 종이에 시간을 그려보라. 이강생이 이 시간 위를 걷도록 할 것’이라고 했어요.”
연극은 9월 광주의 일몰 시간에 맞춰 저녁 7시부터 시작한다. 유리벽을 통해 무대를 비출 석양은, 관객들의 ‘구도’가 끝나는 9시 무렵 별빛으로 바뀔 터다. “그날 비가 와도 좋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외부ㆍ타자와 연결돼 있다는 걸 극장 안팎 풍경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글ㆍ사진 광주=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18 정신을 기려 옛 전남도청 자리에 지어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예술극장(공연)을 비롯해 어린이문화원(어린이콘텐츠), 문화창조원(창작·제작), 문화정보원(연구·자료보존·교육), 민주평화교류원(국제교류) 등 5개 기관으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이다. 예술극장 외에 3개 기관은 11월 말, 민주평화교류원은 내년 5월 개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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